이번 대선의 판도를 좌우할 후보로 안희정 지사가 급부상하고 있다. 이는 비단 지지율에서 20%대로 상승해 있다는 데서만 비롯된 것이 아니다. 그가 던지는 화두들이 차기 정부는 물론 한국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진지한 해답을 요구하고 있는 것들이라는 것, 그럼으로써 대선 경쟁의 내용을 결정지을 수 있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그런데 바로 여기서 ‘안희정의 역설’이 나타나고 있다. 자신이 던진 물음들에 정작 그 스스로가 해답이 준비돼 있느냐는 것, 아니 그 이전에 그 질문들을 제대로 감당할 준비가 돼 있느냐는 것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그가 최근 보이고 있는 모습들은 그 질문의 무게에 그 자신이 짓눌려 있지는 않는가, 라는 의문-안타까움 섞인 의문-이 들게 한다.
무엇보다 자신을 경세가, 초월적 지도자로 내세우는 듯하는 것부터가 그 자신의 어깨 위에 지나치게 무거운 짐을 지우는 듯하다. 성공적인 광역 지자체 장으로서의 7년간의 경험, 젊은 시절부터 공동체의 삶과 국가의 역할에 대해 치열하게 모색했던 역정, 여기에 정치적 스승인 노무현 전 대통령의 삶이 미친 영향, 그리고 그의 비극적 죽음으로 인한 비탄과 고뇌가 안 지사로 하여금 ‘크고 깊은 생각’으로 이끈 듯하다.
그러나 그의 실질과 구체가 아직 이를 따라가지 못하는 듯하다. 무엇보다 말의 화려함과 어눌함의 공존이 그 단면이다. 그가 방송 인터뷰 등에서 한 말을 살펴보면 그는 대통합, 새로운 정치, 민주주의 리더십 등 큰 얘기를 할 때는 거침이 없었(없는 듯했)으나 구체적인 수준으로 들어가서는 말이 꽤 막혔다. 말이 막혔다는 게 단순히 말의 유창함과 눌변의 문제는 아니다. 적확한 어휘를 찾는 데 애를 먹었으며 말의 문법이 흐트러졌고, 무엇보다 말들 간의 정합성을 잃었다. 가령 ‘중요한 건 구체적인 정책보다 민주주의 원칙이다’라고 해 놓고는, ‘제도만이 민주주의를 굳건히 한다’식의 말을 하고 있다. 어눌한 인식에서 어눌한 언어가 나오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그의 보수 통합론, 대연정론에 문제가 있다면 그 자체에 문제가 있다기보다 그것이 깊지 않은 인식에서 나왔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중도(中道)로써 통합을 지향한다고 할 때 그 ‘중(中)’은 ‘넓이’보다는 ‘깊이’의 문제로 봐야 할 것이다. 동양의 사상에서 '중'이란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으며,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도 기대지도 않는 것으로 얘기된다. 보수에 대한 구애는 현상적으로 나타나는 아스팔트를 점령하는 거친 보수를 겨냥할 것이 아니다. 한국 보수의 표면, 거리에서 막말과 비이성적 행태를 보이는 보수를 전체 보수로 보고 표피적인 통합을 하려 할 게 아니라 표피 아래의 진짜 보수, ‘참 보수’를 견인하며 중도와 통합을 제창하는 것이라야 할 것이다.
그는 현실의 해법을 묻는 질문들에 “민주주의가 해법이다”라고 답한다. 좋은 대답이다. 그러나 그 다음의 질문에 대한 답은 과연 있는가. 민주주의가 끊임없는 발전과 진화를 요구받고 있는 현실에서 그가 말하는 민주주의는 어떤 민주주의인가. ‘오직 민주주의일 뿐’이라는 그의 말 속에는 동양에서 이상적 정치가 펼쳐지던 때로 얘기되는 요순 시절의 ‘무위지치(無爲之治)’를 하겠다는 의미가 읽힌다. 그러나 한 번 더 생각해야 할 것은 그 무위는 엄청난 유(有)위(爲)와 작위(作爲)가 전제돼 있는 것이라는 것이다. 정밀한 구상과 정책으로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어떤 ‘선의’에도 불구하고 공허해질 수밖에 없다.
제 3자로서 안 지사를 위해 변명해 보자면 상당한 시련에도 불구하고 대체로 지난 10년간의 안 지사의 '성공'이 결국 지나친 자기확신을 준 듯하다. 경영학의 경구 중에 ‘성공이 위대함의 적’이라는 말이 있는데 그런 점에서 ‘성공의 함정’에 빠진 게 아닌가 싶다. 특히 통합의 사명감의 과잉, 그것은 충청권이라는 출신에서 더욱 가중된 듯한데, 그 통합과 구국의 소명의 과잉이라는 ‘선의’가 초월적 지도자로서의 결연함을 낳은 듯하다. 안 지사에게 지금 당장 필요한 건 그 소명감과 결연함의 무거운 짐을 조금은 내려놓는 것일 듯하다. 그럴 때 스스로에게 지운 ‘교사’의 짐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학생’의 마음가짐을 가질 때 오히려 ‘교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의 앞에 펼쳐질 듯했던 ‘봄날’은 미처 오기도 전에 허망하게 가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이명재 편집위원 prome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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