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이지은 기자]최순실 사태로 인해 어수선한 정국에서 정부 관료들의 복지부동이 국민과 기업의 고통을 가중시키고 있다. 문제가 발생해도 해결이 안 되니 결국 스스로 해결할 수밖에 없다. 정부가 민간에 '그림자 노동(대가를 지급하지 않는 노동)'을 시키는 셈이다.
달걀값은 지난 1월달에만 50% 뛰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 판에 4000원 내외였던 달걀이 한 판에 8000∼1만원까지 오른 것이다. 민간 주체들은 각자도생에 나섰다. 외식업체들은 메뉴에서 달걀을 빼며 대응했고, 가계는 조금이라도 가격이 싼 마트를 찾아나섰다. 설 명절을 앞두고 계란물을 푼 전을 부쳐야 했기 때문에, 주부들은 차마 계란을 장바구니에서 뺄 수 없었다. 사재기 움직임까지 일어나면서 돈 주고도 계란을 못 구할 지경까지 이르기도 했다. 만약 정부가 지난해 10월부터 조류인플루엔자(AI)에 조기 대응해 피해를 줄였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다.
AI에 한 방 얻어맞았으면서도 정부는 또 구제역에 대응에 서툴렀다. 소고기, 돼지고기 가격은 벌써부터 오를 기세다. 소고기와 돼지고기 대신 눈 돌릴 만한 육류는 닭고기뿐이지만, 지난 9일 대형마트들은 닭고기값을 일제히 인상했다. 서민들이 사랑하는 외식 메뉴인 치킨 가격이 뛸 건 불 보듯 뻔하다.
복지부동으로 인해 각자도생에 나서야 하는 건 국민들뿐만이 아니다. 중국의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ㆍ사드) 보복에 얻어맞는 한국 기업들도 피해자다. 정부가 중국 눈치만 보며 구체적이고 적극적인 대응에 나서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유일호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지난 9일 국회 경제분야 대정부질문에서 사드 보복 대응방안에 대한 질의를 받자 "중국이 사드가 연관됐다고 직접 얘기한 적이 없는데, 우리가 먼저 이야기할 수는 없다"는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유 부총리의 인식과 달리 기업들에게는 사드 보복의 충격파가 뼈아프게 다가온다. 최근 중국은 한국산 화장품에 대해 '수입불허' 판정을 내린 데 이어, 식품 수입까지 막고 나섰다. 사드 여파가 점점 전 수출 분야로 확장되고 있는 것이다. '한한령'으로 한류 콘텐츠 수출은 꽉 막혔다. 최근 한국드라마 '도깨비'가 중국 내에서 신드롬적 인기를 끌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지만, 대부분이 불법 다운로드라 제작사는 실질적 이익을 볼 수도 없다.
정부가 복지부동으로 일관하면서 화장품ㆍ자동차ㆍ배터리 등의 관련업계는 직접 대응할 수밖에 없게 됐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민간기업들이 중국 정부에 대응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는 게 업계의 반응이다. 사실상 손 놓고 당할 수밖에 없다. 정부는 지난달 업종별 소위를 구성해 사드 보복에 대응하겠다고 밝혔지만, 아직 구체적 대책은 나오지 않고 있는 상태다.
국민을 위해 일하라고 뽑아놨더니, 정작 중요할 때는 몸을 사리는 이유는 뭘까. 대통령 탄핵정국에 따른 정권교체기가 가장 큰 원인이다. 그러나 이른바 '정치의 관료사회 지배'가 복지부동의 근본 원인이라는 전문가들의 목소리도 높다. 정덕구 니어재단 이사장(전 산업자원부 장관)은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관료들이 정치ㆍ정책 결정과정에서 외부자로 밀려나고 그 빈자리를 정치인과 정치 패거리가 차지했다"고 비판했다. 정책 전문가들이 시시때때로 바뀌는 정치적 논리에 휩쓸리면서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정치로 인해 꺾인 공무원들의 자율성을 회복해야 할 필요성도 제기된다. 복지부동을 막겠다며 내놓은 족쇄가 더욱 복지부동을 가속화하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인사혁신처는 지난해 복지부동 공무원에 대해 중징계를 내릴 수 있도록 하겠다고 했지만, 이에 대한 객관적 기준이 없어 관가가 오히려 혼란해하는 분위기다. 공직기강을 감시하기 위해 점심시간 준수 여부를 단속한다지만 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금지에 관한 법률과 맞물려 공무원들이 민원인과의 만남을 기피하게 만드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지은 기자 leez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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