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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동여담] 세금(稅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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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금(稅金)의 기원은 인류가 농사를 짓고 정착할 때부터라는 설이 유력하다.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 적의 침입을 막을 군인이 필요했다. 국가가 만들어지면서 재정 규모는 커졌다. 초기에는 사람 머릿수대로 세금을 걷는 '인두세'가 대표적이었다.


그리스 아테네에서는 이와 비슷한 '신체세'가 있었다. 아테네 시민권을 가진 남성을 제외한 거주 외국인, 일부 여성, 노예 등에 부과한 세금이다. 당시 외국인이나 노예는 재산을 소유할 수 없었다. 그래서 각자의 몸뚱이에 세금을 매겼다. 거주 외국인의 연간 신체세는 12드라크마. 일반 시민의 12일치 소득과 비슷한 액수였다. 신체세를 내면 아테네 시민의 특권과 생활을 함께 누렸고 장사도 할 수 있었다.

중국 한(漢)나라의 '둔전제(屯田制)'는 군인들에게 주인 없는 땅을 경작하도록 해 일부는 국가에 바치고 나머지는 봉급으로 가져가는 방식이었다. 징병돼도 농사를 지어 가족을 부양할 수 있었고, 군량미도 늘렸다. 위(魏)나라의 조조는 '민둔(民屯)'으로 발전시켰다. 전관(田官)을 두고 징발된 농민들로 하여금 황무지를 개간해 경작하도록 한 뒤, 수확물의 50~60%를 징수했다. 위나라가 삼국을 통일한 데에 둔전제의 역할이 작지 않았다. 이후 중국 왕조는 이를 계승했다.


로마에서는 '십일조(十一條)'라는 직접세가 있었다. 수입이나 수확의 10%를 내도록 했다. 이와 별도로 5%의 간접세가 부과됐다. 로마가 정복한 도시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시칠리아섬에서는 십일조만 거뒀다. 포에니전쟁에서 카르타고를 물리친 로마는 시칠리아의 중요성을 감안해 감세정책을 폈다. 카르타고 본국이 20~25%의 세금을 물린 것에 비해 파격적인 혜택이었다. 로마는 교육·의료인에게도 세금을 낮춰줬다.

로마는 징세를 담당하는 기관을 입찰을 통해 선정해 세금을 걷도록 했다. 당시 세금 징수를 맡은 관리를 '세리(稅吏)'라고 불렀다. 그들의 우두머리인 세리장(稅吏長)은 한 지역의 징수권을 사서 세금을 받아냈다. 세리장은 자기 멋대로 금액을 정해서 많은 세금을 거둬들인 뒤 착복하기 일쑤였다. 신약성서에서 세리들은 압제자의 하수인이자 반역자, 변절자로 규정됐다. 레위인(레위의 후손들) 마태가 세리였다.


성경에서는 바리새인들이 '로마 황제 가이사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옳으냐'는 물음으로 예수를 궁지로 몬다. 세금을 내지 말라고 하면 반역죄로 체포될 것이고, 세금을 내라고 하면 유대인들의 마음을 잃게 되는 간교한 질문이었다. 예수는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는 유명한 말로 위기를 넘긴다. 우리나라에서 종교인 과세가 논란에 휩싸였을 때 찬성하는 측은 이를 근거로 '예수도 세금을 냈다'고 주장했다.


벤자민 플랭클린은 "죽음과 세금은 피할 수 없다"고 했다. 공자는 호랑이에게 시아버지와 남편, 아들까지 잃은 여인이 혹독한 세금 때문에 산을 내려가지 못하는 사연을 듣고 "가혹한 정치는 호랑이보다 더 무서운 것"이라고 말했다. 가렴주구(苛斂誅求)라는 말도 여기서 나왔다. 아담 스미스는 '국부론'에서 조세의 일반원칙을 제시했다. '국민의 지불능력에 따라 부과돼야 한다' 등 네 가지 원칙은 지금도 각국의 조세의 근간이 된다.


대선을 앞두고 '세금을 올리자'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늘어나는 복지재정에 증세는 불가피해 보인다. 그렇다고 호랑이보다 무서운 세금이어서는 안된다. 옛부터 나라의 흥망성쇄는 조세에서 시작했다.


조영주 경제부 차장 yjcho@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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