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0만 촛불 민심이 대한민국 현대사를 어둡게 물들였던 검은 장막을 서서히 걷어내고 있다.
최순실 게이트를 계기로 박근혜정권의 무능과 부패를 파헤치기 위해 작년 말 출범한 특별검사팀은 지난 21일, 마침내 김기춘 전비서실장을 구속했다. 이번에 그를 구속시킨 사유는 문화계 ‘블랙리스트 작성’을 주도한 혐의지만 사실 그는 지난 반세기 동안 독재 정권을 위해 유신헌법을 입안하고, 재일교포 유학생 간첩 사건·민청학련 사건·제2차 인혁당 사건·강기훈 유서대필 사건 등을 조작해 수많은 죄없는 청년들의 꽃다운 청춘을 말살시킨 주역으로 지목되는 인물이기도 하다.
남존여비가 당연시 여겨지던 시절에도 일개 아녀자에게 한을 품게 만들면 그 마음이 하늘에 닿아 따뜻한 오뉴월에도 겨울철 서리가 내린다고 했다. 그러니 영문도 모르고 영장도 발부되지 않은 상태에서 경찰서로 끌려가 고문을 받고 간첩 누명을 쓴 채 오랜 세월을 감옥에서 보낸 수많은 조작 사건 희생자들의 한(恨)은 삼복 더위에 폭설이 내려도 풀기 힘들 것 같다. 그저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팔순을 바라보는 나이에 수갑을 찬 채 특검에 출석하는 측은한 노인의 모습을 보며 그들의 한과 분노가 조금이나마 덜어지기를 바랄 뿐이다.
김전실장 구속은 흑막(黑幕)의 역사를 장식했던 주요 등장 인물에 대한 단죄를 넘어 아버지의 정치적 유산을 기반으로 승승장구 했던 박대통령의 태생적 한계가 심판대에 올랐다는 것을 의미한다.
현재로서는 특검의 활약이 대다수 국민의 눈에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부당한 원칙(?)을 사수하는 집단으로 비쳐지는 재판부를 얼마나 설득할 수 있을지는 알 수가 없다. 실제 최순실게이트 재판이 진행되는 지금 이 시기에도 F학점을 받아야 할 학생(정유라)에게 B학점을 준 교수에게는 구속 영장이 발부된 반면, 국민 연금을 볼모로 경영권 승계에 도움을 받은 대가로 430억원을 최씨 모녀에게 지원한 혐의를 받은 재벌 부회장에 대한 구속 영장은 기각됐다.이 결정에 분노한 법률가들이 시국농성단을 결성해 법원 앞에서 사상 초유의 노숙 농성을 벌이는 걸 보면 국민정서법이 아닌 실정법 측면에서도 문제가 되는 판결인 듯싶다.
물은 차면 넘치기 마련이다. 지난 세월, 선량한 시민들을 다양한 방법으로 희생시킨 대가로 부귀영화를 누려온 부패한 기득권 세력들은 결국엔 법적으로, 또 법이 못하면 민심과 역사가 그들의 죄를 심판할 것이다. 문제는 우리 사회가 부당한 세력이 기생하지 못하도록 반칙과 특혜가 통하지 않는 공정성을 갖추는 일이다. 이를 위해서는 ‘모든 국민은 법 앞에서 평등하며 차별받지 않는다’는 헌법 11조의 원칙이 지켜져야 한다.
만일 헌법이 보장한 이 권리가 돈·명예·지위·권력 등에 의해 왜곡되는 상황이 반복된다면, 부당한 판결을 받은 사람들은 사회를 향해 분노를 실은 공격성을 폭발시킬 것이다. 정신의학적으로 인간의 유전자에 각인돼 있는 원초적 본능인 공격성은 좌절이나 소외, 차별 등을 경험할 때 증폭되기 때문이다. 물론 차별의 정도가 심할수록 공격성의 강도도 세지기 마련이다.
부당한 특혜나 차별은 사회 구성원 모두의 불만과 갈등을 부추겨 병적인 사회로 치닫게 한다. 예컨대 100억을 횡령한 재벌에게 헌법 정신에 어긋나는 부당한 사면이 내려지면 99억을 횡령한 사람조차 자신의 죄를 반성하는 대신 ‘재수가 없어서 걸렸다’거나 ‘큰 부자가 아니라서 사면을 못받는다’는 식으로 남 탓을 하기 마련이다.
21세기 대한민국은 다양한 가치가 공존하는 자유민주주의 국가다. 서로 다른 지향점을 가진 사회 구성원간의 갈등은 차고 넘치기 마련이다. 따라서 개개인이 불안과 불만을 토로하고 여러 가지 방법으로 서로 다른 의견을 조율할 기회가 제공돼야 한다. 그래야 타인의 생각을 존중하는 법도 배우게 된다. 이를 위해 헌법 21조와 22조는 언론과 출판, 집회와 결사,학문과 예술의 자유를 보장한다. 문화계 ‘블랙리스트 작성’은 민주공화국 헌법을 심각하게 손상시킨 파렴치한 범죄 행위인 것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민심(民心)은 천심(天心)’이며 백성의 목소리는 신의 소리(vox populi vox dei=People‘voice, God’s voice)라고 했다. 과연 정치권과 사법부가 이 만고불변의 진리를 얼마나 진심으로 이해하고 실천할 것인지, 모든 국민이 주인의식을 가지고 세심히 지켜봐야 할 시점이다.
황세희 국립의료원 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