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발유 가격이 ℓ당 250원. 기름 한 방울 안 나는 한국에서는 부럽기만 한 가격이지만, 가격이 높다는 불만이 쏟아진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이야기다. 사우디아라비아를 포함한 중동 산유국들은 2년 넘게 이어진 글로벌 저유가에 직격탄을 맞았다. 석유의존도가 높은 경제구조 탓에 심각한 재정난이 이어졌다.
중동 국가들은 일제히 자국 내 휘발유 소매가에 지급한 보조금을 감축하고 공무원 월급을 삭감하는 등 긴축에 들어갔다. 1ℓ에 15센트인 사우디아라비아의 휘발유 소매가격이 50%나 오른 이유다. 아랍에미리트연합(UAE)은 자국 내 휘발유 보조금을 전면 폐지했고 걸프해 연안 국가들은 세수를 늘리기 위해 전에 없던 부가가치세를 도입하기로 합의했다.
글로벌 유가가 하락 할 때마다 중동 국가들의 한숨 소리가 깊어졌다. 허리띠만 졸라매는 임시방편이 아니라 유가가 배럴당 50달러이든 30달러이든 견딜 수 있는 경제구조를 만들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왔다. 석유가 전부인 중동 국가들이 '석유중독'에서 벗어나기로 마음먹고 새로운 산업으로 눈길을 돌리기 시작한 것이다.
사우디아라비아의 '비전 2030', UAE의 'UAE 비전2021', 쿠웨이트의 '비전 쿠웨이트2035' 등 석유중심인 경제구조를 바꾸기 위한 중장기 정책들이 발표됐다. 정보통신, 금융, 사회간접자본, 물류 등 비(非)석유산업에 힘을 쏟기 시작했다. 유전개발과 석유화학에 치중된 대규모 투자는 제조업 성장을 위한 산업단지 조성, 물류·항만시설 확충, 교육·문화 인프라 구축 등 기반시설로 옮겨가고 있다. 개발 속도를 높이기 위한 해외 인재유치와 부족한 투자자금을 메우기 위한 외자유치에도 적극 나서고 있다.
유가 하락의 위기를 체질 개선의 기회로 살리기 위한 중동 국가들의 움직임은 새로운 먹을거리를 찾는 우리 기업들에게도 기대감을 갖게 한다. 과거 건설노동자 시절 보여준 근면함과 높은 가전시장 점유율로 표현되는 제품 경쟁력은 중동시장에 한국산(made by Korea)에 프리미엄을 형성했다. 우리 중견기업이 UAE 정부가 발주한 사업을 수주하고 한국 자동차가 독일산 자동차와 당당히 경쟁할 수 있는 이유다.
중동 경제의 지각변동을 감지한 정부와 공공부문도 우리 기업들의 제2 중동 붐 합류를 위해 발 벗고 나섰다. 코트라(KOTRA)는 지난 10월 보건의료시장 개척을 위해 쿠웨이트와 이란에 의료사절단을 파견했고, 한국기계산업진흥회는 기계류 수출지원을 위해 중동에 시장개척단을 보냈다.
한국무역보험공사도 현장에서 우리 기업들을 밀착 지원하기 위해 UAE 두바이지사를 개소했다. 바이어에 신용 정보를 제공하고 수출 대금 미회수 위험을 없애는 무역보험을 공급해 우리기업들의 과감한 중동시장 진입을 돕는다. 또한 중동 국가들의 산업다각화 정책에서 발주되는 프로젝트 정보를 실시간으로 공유하고 우량 프로젝트에는 우리 기업들의 참여를 조건으로 정책금융도 공급한다. 우리 기업들의 신흥시장 진출을 지원하기 위해 얼마 전 추가경정예산으로 마련된 무역보험기금은 중동시장 수출 확대와 프로젝트 수주에도 기대감을 갖게 한다.
글로벌 유가하락 때문에 석유화학 플랜트 발주가 줄고 있다는 단편의 근시안 시각만으로는 중동에 불고 있는 새로운 모래바람을 지나치기 십상이다. '실리콘데저트(Silicon Desert)'로 불리는 정보기술(IT)단지, 전자상거래 플랫폼인 중동아마존 등 긴 호흡으로 접근해야 성과를 공유할 수 있는 신성장 산업들이 꿈틀대고 있기 때문이다. 새롭게 그려질 중동의 산업지도 한 가운데, 무역보험과 손잡은 더 많은 우리기업들이 자리하길 기대해 본다.
장진욱 무역보험공사 두바이지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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