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항의 상징이 된 가이 포크스의 얼굴에 얽힌 사연
2006년 국내에 개봉한 '브이 포 벤데타'에서 주인공 브이는 이렇게 말한다. "기억하라, 11월5일을 기억하라." 영화 속 배경은 3차 세계대전 후 2040년의 영국. 곳곳에 설치된 카메라와 녹음 장치는 국민들의 삶을 완벽하게 통제하고 있고 정치적 성향이나 성적 취향, 피부색 등이 다른 이들은 어디론가 끌려가 사라져 버린다. 하지만 누구도 문제를 제기하지 못하고 숨죽여 산다. 가면을 쓴 브이가 외치는 11월5일은 이 압제에 맞서 싸우는 혁명의 날이다. 하필 이날을 디데이로 정한 것은 브이가 쓰고 나오는 가면과 연관이 있다. 11월5일은 실제로 영국에서 '가이 포크스 데이'로 기념하는 날이다.
이날은 1605년 가이 포크스가 영국 의회를 폭발시키려고 했던 날이다. 그는 국회의사당 지하에 폭약을 설치해 당시 잉글랜드 왕인 제임스1세와 대신들을 한 번에 죽이려 했다. 그가 왕을 죽이려고 했던 이유는 종교 때문이었다. 영국 국교회였던 제임스 1세는 가톨릭과 청교도를 억압했다. 이에 가톨릭 신자였던 포크스 등이 왕을 죽이고 가톨릭을 억압하지 않을 이에게 왕위를 넘겨줄 계획을 세운 것이다. 하지만 의회에서 폭약이 터지면 가톨릭 신자인 다른 대신까지 죽게 되는 것을 염려한 이의 밀고로 포크스는 거사를 앞두고 체포돼 이듬해 처형당한다.
포크스의 계획은 실패로 끝났지만 그는 죽음 이후 오히려 유명해졌다. 영국 의회가 왕의 건재를 축하하기 위해 포크스의 거사일인 11월5일을 감사절로 정한 것이다. 처음에는 포크스의 실패와 왕의 무사함을 기념하기 위해 불꽃놀이를 했지만 점차 시간이 지나고 왕에 대한 불만도 쌓이면서 이날은 오히려 포크스의 실패를 아쉬워하는 날이 됐다고 한다. 영국인들은 이날을 '가이 포크스 데이'라고 부르며 그를 상징하는 인형을 쓰고 행진을 하기도 했다. 종교와 관계없이 신교도와 구교도 모두 즐기는 축제가 된 것이다. 그리고 영화 브이 포 벤데타 등을 거치며 포크스의 가면에는 저항과 전복의 이미지가 새겨졌다.
가이 포크스 가면은 이제 세계 곳곳의 시위 현장에서 볼 수 있다. 영화 브이 포 벤데타 이후에 해킹단체 어나니머스가 2008년 사이언톨로지와 전쟁을 선포하고 시위 현장에서 이 가면을 쓰기 시작했다. 이후 가이 포크스의 얼굴은 전 세계 반정부 시위대의 상징이 됐다.
가이 포크스와 브이의 거사일이었던 11월5일, 2016년 대한민국에서도 가이 포크스 가면이 갖는 의미는 여전히 유효하다. 영화 브이 포 벤데타에서 브이는 이렇게 말한다. "이 나라는 잘못됐다. 한때는 자유로운 비판과 사고, 의사 표현이 가능했지만 이제는 감시 속에서 침묵을 강요당한다. 어쩌다 이렇게 됐나? 누구의 잘못인가? 가장 큰 책임은 정부에 있고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 지경이 되도록 만든 장본인은 바로 방관한 여러분이다." 그러면서 강조한다. "기억하라, 11월5일을 기억하라." 5일 오후 서울 광화문 일대에서도 대규모 집회가 열린다.
김철현 기자 kc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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