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스푸틴과 최태민 일가①죽은 모친의 영매를 자처하며 권력 핵심에 파고든 '한국의 괴(怪)종교인'
[아시아경제 김희윤 작가] 인간을 성직자와 속인, 두 계급으로 분류하는 것은 고대 국가경영의 기본 전제였다. 이집트의 제사장들은 대대로 훈련받은 예언가들로 이집트의 젖줄이라 불린 나일강 물빛의 미세한 변화를 감지하고 홍수와 가뭄을 정확히 예측해 그 지위를 공고히 했는데, 신의 뜻을 지상에 전하는 유일한 대표자로 이들의 세력이 막강해짐에 따라 곳곳에 거대한 신전이 세워졌고, 이 신전에 쏟아지는 막대한 재화를 관리하기 위해 문자가 고안되고 서기라는 직책이 생겨났다. 이들은 파라오의 제사까지 장악함으로 세속적 권력까지 손에 쥐었다. 신정정치의 시대, 기원전 2,000년 전쯤 의 이야기다.
제정러시아의 마지막 차르 니콜라이 2세의 병약한 외아들은 왕가와 나라 전체의 근심거리였다. 빅토리아 여왕으로부터 시작된 ‘혈우병’ 보인자였던 알렉산드라 황후는 네 명의 공주를 출산한 끝에 아들 알렉세이를 얻었지만, 혈우병이 발병함에 따라 아들의 건강을 지키기 위해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했고, 당시 의학기술로는 치료가 불가능한 상황에서 마지막으로 종교에 의지하게 됐는데, 이때 수도승을 자처한 그리고리 라스푸틴과 인연을 맺게 된다. 사경을 헤매던 황태자의 병세가 의사의 치료엔 차도가 없다가 라스푸틴의 기도와 치료에는 곧장 호전되는 것을 지켜본 황후는 그를 ‘완벽히’ 신뢰하기 시작했고, 아들의 건강을 염려하는 황제 부부의 신임을 얻은 라스푸틴은 처음엔 종교, 이윽고 외교와 내정에 깊숙이 개입하며 종내에는 정사를 좌지우지하기에 이르렀다. 일개 요승이 제정국가의 정사를 뒤흔들고 왕조의 몰락을 조래한 사건, 약 100여 년 전인 1900년대 초의 일이다.
멀게는 수천 년, 가까이는 백여 년 전의 이야기가 온 국민의 기시감을 불러일으키는 까닭은 도무지 매일같이 터져 나오는 언론 보도 내용이 ‘상식적’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사건의 연속이기 때문이리라. 보고도, 듣고도 믿을 수 없는 그간의 기행과 이사(異事)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박지원 국민의당 비대위원장의 표현대로 ‘사교(邪敎, 사이비 종교)’에 사로잡힌 박근혜 대통령과 최태민, 최순실 부녀의 관계를 되짚어봐야 한다. 40년 넘게 이어진 질긴 인연의 뿌리는 어디서부터 시작됐고, 어떤 과정을 통해 마이너종교 교주와 그 딸이 권력자를 사로잡아 청와대를 장악하고 국기문란을 초래했는지. 그 시작은 지방에서 올라온 연이은 세 통의 편지였다.
결핍에 따른 간절함
1974년 8월 15일 국립극장에서 영부인 육영수가 총격으로 눈을 감았다. 당초 암살범의 목표는 박정희 대통령이었으나 실패하자 영부인을 저격한 것. 사건 당시 프랑스 그르노블 대학에서 어학연수 중이었던 영애(令愛) 박근혜는 급거 귀국, 어머니의 장례를 치르고 학업이 아닌 퍼스트레이디의 길을 걷게 된다. 그 와중에 지방에서 영애 앞으로 세 통의 편지가 도착한다. 당사자가 아니면 알 수 없는 그 편지의 내용은 훗날 미국으로 망명한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의 회고록에 상세하게 실려 있는데, 행간에 기묘한 의미를 담은 문장들이 눈길을 끈다.
“어머니는 돌아가신 게 아니라 너의 시대를 열어주기 위해 길을 비켜주었다는 것을 네가 왜 모르느냐. 너를 한국, 나아가 아시아의 지도자로 키우기 위해 자리만 옮겼을 뿐이다. 어머니 목소리가 듣고 싶을 때 나를 통하면 항상 들을 수 있다. 육 여사가 꿈에 나타나 ‘내 딸이 우매해 아무것도 모르고 슬퍼만 한다’면서 ‘이런 뜻을 전해 달라’고 했다.”
역사 속에서 권력자의 유서를 탈취해 망자의 유고를 조작하고 권력을 편취한 모사꾼은 많았지만, 최태민은 편지를 통해 있는 뜻을 왜곡한 것이 아니라 애초에 (더 이상) 세상에 없는 인물을 소환해 언제든 소통할 수 있다며 현몽(現夢)을 통한 ‘영매(靈媒)’를 자처했다. 당사자가 아닌 제 삼자가 기록한 편지 내용을 어디까지 신뢰해야 하는지의 문제는 독자의 몫이지만, 이후 두 사람의 관계를 비춰볼 때 편지 내용이 어머니를 잃은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한 23세 영애에게 큰 심적 동요를 불러왔을 것은 자명한 상황. 편지를 읽은 영애는 1975년 3월 6일 최태민을 청와대로 불러 면담을 가졌고, 이 면담을 계기로 둘의 인연이 시작됐다.
전횡의 시작
영애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 성공한 최태민은 그간의 행적을 정리하고 새로운 인생을 설계했다. 바로 직전까지 대전 지역을 중심으로 난치병 치료와 예지력을 내세워 이른바 ‘영세교(혹은 영생교)’의 교주로 활동한 그는 면담을 마치고 돌아온 후 4월 10일, 사이비 종교를 접고 곧장 대한예수교장로회 종합총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교리와 신학에 대한 공부 없이 받은 가짜 안수였지만 내용은 중요치 않았다.
그는 자신의 호칭을 ‘태자마마’에서 ‘목사’로 세탁하고 난 뒤 ‘대한구국선교회’를 설립하고 총재로 취임하며 영애와의 관계를 돈독히 해나갔고, 이듬해인 1976년 단체 이름을 ‘구국봉사단’으로 바꾸고 나선 영애에게 명예총재 자리를 제안해 자신은 총재, 박근혜 대통령은 명예총재로 추대했다. 사이비 종교가 곧장 국가기관에 준하는 중요단체로 탈바꿈하자 최태민은 영애의 이름을 내세워 본격적으로 이권 사업과 청탁을 비롯한 각종 비위 행각에 나섰다. 이 같은 내용은 당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기록한 보고서 ‘최태민 수사자료’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이에 따르면 횡령, 사기, 이권개입 등 비리사건만 44건에 달하며 주로 봉사단 공금을 유용하거나 은행융자를 알선해 토지매입과 건설사업에 개입한 정황이 눈에 띈다. 그의 범행이 단순한 종교형 범죄에 그치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
화려한 여성편력
퍼스트레이디의 신임을 바탕으로 정·재계에 영향력을 행사한 최태민은 당시 기업 총수들을 압박해 봉사단에 막대한 사업비를 후원할 것을 종용했고, 대외활동에는 관의 행정지원을 서슴없이 요청해 사업을 이끌어나갔다.
한편, 6명의 부인으로부터 3남 6녀의 자녀를 둔 최태민은 과거 복잡한 여성관계로 인한 기행이 잦았다. 간음죄로 고소당하자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됐다가, 이내 다시 하산하여 전 부인과 만나는 등 앞서 언급한 수사자료는 그가 ‘6번째’ 부인과 불화로 금화사로 도피했다 환속 후 다시 5번째 부인과 재결합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최태민 수사자료’는 그의 여성문제도 비교적 상세히 기록했는데, 당시 수사를 통해 확인된 여성 12명의 나이와 소속, 그리고 최태민과의 관계가 자세하게 드러나 있다. 전횡을 일삼고 다수의 여성과 관계를 맺는 일련의 엽색행각에서 최태민과 라스푸틴은 많이 닮아있었다. 이후 최태민의 종교적 후계자인 딸 최순실과 박근혜 대통령의 유착에서도 이성적 사고로는 이해할 수 없는 끈끈한 이해관계가 대를 이어 전승되기에 이른다.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2007년 대선 당시 야권의 유력 후보로 거론됐을 때 버시바우 주한 미국대사는 본국에 보낸 외교 전문에서 최태민을 ‘한국의 라스푸틴’이라 언급한다.
“박근혜가 자신의 과거에 대해 설명해야 할 상황에 놓였다. (...) 35년 전 최태민과의 관계도 그에 포함된다. (...) ‘한국의 라스푸틴’이라 불렸던 최 목사가 육영수 여사 서거 후 퍼스트레이디로 있던 박근혜를 지배했다는 설에 대해 (...) 카리스마 넘치는 고 최태민 목사는 인격 형성기에 박근혜의 심신을 완전히 지배했다. 그 결과 그의 자녀들은 엄청난 부를 축적했다는 소문이 무성하다.”
김희윤 작가 film4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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