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난히 더웠던 지난 8월 '저요오드식'을 조리하고 먹어보는 경험을 약 2주 동안 했다. 저요오드식이 뭔지는 갑상선암 환자들과 그 가족이라면 자연히 알게 되는데, 요오드치료를 앞두고 효과를 높이기 위해 일정기간 요오드 섭취를 제한하는 것이다.
치료를 위한 식단이기 때문에 언뜻 들어도 맛과는 거리가 굉장히 멀 것 같다. 하지만 의외로 먹을 만한 것도 꽤 많았다. 대표적인 게 밀가루다. 식물성 기름도 가능하다. 밀가루에 기름이라니. 요오드만 함유돼 있지 않다면 뭐든 튀겨먹고 부쳐 먹을 수 있다고 해석했다.
게다가 밀가루로 만든 국수로 잔치국수, 비빔국수, 칼국수 등을 양껏 만들어 볼 미어지게 먹는 상상도 했다. 가족으로서 저요오드식의 고통을 함께하겠다고 호기롭게 선언한 것을 몹시 후회하고 있었는데 평소 가까이 하지 않던 튀김, 부침개, 칼국수를 먹을 수 있다고 하니 좀 설레기까지 했다.
병원에서는 되도록이면 우리밀로 만든 밀가루를 먹을 것을 권했다. 수입의 경우 재배와 제조, 유통 과정에서 어떤 성분이 첨가됐는지 알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우리밀로 만든 밀가루 등을 구입하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지금껏 구태여 우리밀을 찾아 먹은 적이 있었나. 돌이켜보니 분식은 물론 빵과 과자 등에 수입 밀로 만든 밀가루를 쓴다는 것을 그다지 께름칙하게 여기지 않았다. 우리밀 살리기 운동이 본격화된 1990년대 중반 우리밀만을 취급하는 식당들이 생겼을 때도 되레 맛이 덜하지 않을까 괜한 선입견에 즐겨 찾지 않았던 것 같다.
밀은 1960년대까지만 해도 자급률이 30~40%에 달했다고 한다. 하지만 싼 가격의 수입밀에 밀려 점차 생산량이 줄어 1984년 정부의 밀수매 중단 이후엔 아예 종자도 구하기 어려워졌었다. 그러다 1991년 가톨릭농민회 등을 중심으로 우리밀살리기운동본부가 꾸려졌다. 우리 식생활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지만 전량 수입에 의존해야 했던 밀가루의 자급은 그 이후에서야 점차 이뤄지기 시작했다.
이제는 어디서나 손쉽게 우리밀 밀가루를 구할 수 있게 됐다. 저요드식을 위한 우리밀 밀가루 한 봉지를 손에 들고 생각했다. 사라졌던 우리밀을 다시 심고 수확해 시장에서 자리 잡게 하기까지는 누군가의 피땀 어린 노력이 들어갔을 텐데 25년 동안 잘도 무심히 살아왔구나.
우리밀 살리기를 위해 땀 흘렸던 사람들 중에는 지난해 시위 중 경찰의 물대포에 맞아 혼수상태에 빠졌다 25일 숨을 거둔 농민 백남기씨도 있었다고 한다. 그는 지난해 우리밀을 파종한 뒤 상경해 집회에 참가했었다.
변하지 않는 것은 우리밀이든 수입밀이든 아랑곳 하지 않는 무심함만이 아닌 듯 하다. 우리밀 살리기 운동이 시작된 1991년 당시 경찰은 병원에서 추락사한 박창수 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의 시신을 확보하기 위해 영안실을 부수고 들어가 강제로 부검을 실시했다. 같은 해 과잉진압으로 성균관대 김귀정양이 사망하자 또 다시 부검을 둘러싸고 유족과 대치했다. 백남기씨 부검을 둘러싼 대립을 보면 25년 전이나 지금이나 경찰은 유족에게 전혀 신뢰를 주지 못하고 있고, 세상은 늘어난 우리밀 생산량만큼도 나아지지 않은 것 같다.
다시 저요오드식 얘기로 돌아오면, 채소로만 국물을 우리고 감자와 애호박을 넣어 끓인 우리밀 칼국수의 맛은 담백했다. 소면을 삶아 무요오드 고추장과 식초, 설탕으로 만든 양념장에 비벼 오이를 얹어 먹는 비빔면은 산뜻했다. 먹으며 궁금해졌다. 요사이 뉴스를 보면 아무리 궁리해도 이 담백함과 산뜻함 이상의 위로를 찾지 못하는 것은 누구의 책임일까.
김철현 기자 kc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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