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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명훈 칼럼]셀카봉의 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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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명훈 칼럼]셀카봉의 진화 박명훈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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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길을 가다가 덜컥 셀카봉 하나를 샀다. 한 번도 사야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는 물건이니 충동구매가 분명하다. 가게 주인의 뛰어난 마케팅에 넘어간 결과다.


가게 앞의 셀카봉 매대에는 '무선 블루투스 셀카봉'과 '파격 할인'이란 글귀가 큼지막하게 붙어 있었다. 나의 시선을 끈 것은 파격적인 할인율보다는 블루투스라는 단어였다. 셀카봉을 써 본 적이 없고, 필요한 물건으로 여기지도 않았던 내가 놀라서 속으로 이렇게 외쳤다. '이 같은 미물에서도 블루투스가 작동된다니!'. 상인의 날카로운 촉각이 그런 속 마음을 헤집고 들어왔고 급기야 '첨단기술'로 진화한 셀카봉 앞에서 지갑을 열기에 이르렀다.

나이든 사람들에게 셀카 비슷한 추억은 단체사진을 찍을 때 정도가 아닐까 싶다. 사진사는 삼각대에 카메라를 세워 놓고 셀프타이머를 맞춘 후 부리나케 대열 속으로 달려 와야 했다. 스스로는 피사체가 될 수 없는 게 사진 찍는 사람의 숙명이었다.


스마트폰은 사진의 새 역사를 열었다. 모두가 카메라를 쥐고 산다. 카메라가 탄생한 후 전 인류가 카메라를 보유하는 초유의 시대가 시작됐다는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피사체의 주인공도 바뀌었다. 내가 나를 찍는다. 언제 어디서나 찍을 수 있다. 즉시 보고 즉시 보낸다. SNS에 띄우면 반응 또한 즉시적이다.

애플의 아이폰은 2007년, 삼성의 갤럭시는 2009년에 첫 선을 보였다. 초기 스마트폰 카메라는 영상통화용이어서 화질이 떨어졌다. 메이커들이 카메라의 중요성에 눈을 뜨면서 휴대폰 카메라의 성능은 디지털 카메라를 뺨치는 수준으로 빠르게 올라섰다. 셀카 열풍에 불이 붙었다. 2013년 영국 옥스퍼드대학은 '셀피(selfie, 셀카)'를 올해의 단어로 선정했다. 같은 해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은 '미 미 미 제너레이션(Me Me Me Generation)'을 커버스토리로 다루며 셀카족을 집중 조명했다.


황당한 '셀카 사고'도 잇따랐다. 절벽에서 셀카를 찍던 젊은 부부는 아들딸을 남겨둔 채 추락해 숨졌다. 운전 중에 셀카를 찍던 여성이 중앙분리대로 돌진해 사망하는 사고도 일어났다. 셀카 사진을 SNS에 올렸다가 쇠고랑을 찬 멍청한 살인강도도 나왔다. 최근에는 미국 모델 킴 카다시안의 셀카 기사가 화제가 됐다. 지난 8월 멕시코에 휴가를 가서 4일간 6000장의 셀카를 찍었다는 내용이었다. 하루 8시간 잠자는 시간을 빼고 1분에 평균 2장 꼴이다.


셀카 열풍의 주역은 10~30대 젊은이들이다. 사회학자들은 그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그들은 컴퓨터와 스마트폰으로 소통이 능숙한 인터넷 원주민이다. 자녀 수가 적어 '너는 특별하다'는 말을 들으며 성장했다. 대면 직접 접촉은 과거 세대보다 서툴다. 그 결과 인터넷 관계에 능하지만, 자아도취적 성향이 강해졌다.


셀카 열풍의 산물인 셀카봉이 본격 등장한 것은 2013년. 겨우 3년 전이다. 가게 주인은 셀카봉의 진화를 3단계로 설명했다. 처음엔 스마트폰을 단순히 매단 막대기, 다음은 선으로 연결된 셔터, 이제는 블루투스로 줌인-줌아웃까지 이뤄지는 첨단기기. 고급 스마트폰 값의 100분의 1이 될까 말까 한 셀카봉. 이런 소박한 기기에도 첨단기술이 공유되는 세상이다.


얼떨결에 셀카봉을 사기는 했지만 사용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아날로그 세대의 한계이자 충동구매의 말로다. 중장년층에서 셀카 애용족은 정치인 정도가 아닐까. 대선도 가까워졌으니 서민 코스프레 셀카 사진이 자주 등장할 것이다. 스마트폰과 셀카봉이 한층 진화해 연출된 미소를 거둬내고 그들의 감춰진 속셈과 능력까지 찍어내는 날이 온다면 얼마나 좋을까.


박명훈 전 주필






pmhoon@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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