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철현·권성회, '혀'로 취재하다 - 호남서 올라온 '특미'…걸쭉하고 고소, 얹힌 미나리도 별미
‘닭 잡아먹고 오리발 내어놓다’라는 속담이 있다. 줄여 ‘오리발 내밀다’라고도 한다. 떳떳하지 않은 행동을 하고도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딴전을 부리는 사람에게 하는 말이다. 남의 닭을 몰래 잡아먹었는데 이를 닭 주인이 추궁하자 닭발과는 전혀 다르게 생긴 오리발을 보여주며 내가 먹은 것은 오리라고 시치미를 뗀 상황을 표현한 것이다. 그런데 이 말을 들으면 과거엔 오리가 닭보다 못하다고 여겨졌던 것이 아닐까하는 의구심이 생기기도 한다.
언론인 홍승면 선생도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초반까지 한 잡지에 연재했던 음식 칼럼 ‘백미백상’에 이런 내용을 썼다. 당시 TV프로그램에서 이 속담을 다뤘다고 소개한 그의 글을 보면 “여기서 문제 삼는 것은 우리나라에서는 닭이 보다 고급이고 오리는 저급으로 여겨지고 있다는 것을 이 속담이 말해 주고 있다는 점이다”라고 했다. 지금이야 오리가 더 대접 받는 재료가 됐지만 과거에는 오리고기가 닭고기에 비해 더 질기고 기름도 많은 편인데다가 비린내도 있었기 때문에 이런 평가가 나왔을 수 있다.
◆오리발 내미는 것은 ‘보양식’ 먹었다는 자랑?= 하지만 이는 오리 입장에선 억울한 얘기다. 영양에 있어서는 오리고기가 더 뛰어나기 때문이다. 오리고기에는 비타민 B군이 많으며 특히 불포화지방산이 풍부하다. 불포화지방산은 주로 식물성 지방에 많이 포함돼 있는데, 혈중 콜레스테롤을 높이는 포화지방산과 달리 혈중 콜레스테롤을 낮추는 기능을 한다. 닭 잡아먹고 오리발 내미는 사람은 어쩌면 닭도 먹고 오리도 먹었는데 그중 더 몸에 좋은 오리를 먹은 것을 자랑한 것일 수도 있겠다.
오리 조리법은 다양하다. 살을 저며 생고기 그대로 불판에 올려 구이로 먹기도 하고 양념을 해 ‘주물럭’으로 구워 먹기도 한다. 훈제된 오리 살코기는 일반 가정에서도 쉽게 먹을 수 있다. 많은 오리 요리 중에서 오리탕은 그야말로 보양식으로 제격이다. 말 그대로 오리를 끓여낸 음식인데 오리고기에 양파, 무, 버섯 등 갖은 채소를 넣고 푹 익혀 먹는 것이다. 닭백숙처럼 각종 한약재를 넣고 삶아내 고기와 국물을 먹기도 한다.
오리탕은 대개 어딜 가나 엇비슷하지만 광주식 오리탕은 좀 특이하다. 들깨를 통째로 갈아 만든 육수에 오리고기를 넣고 끓이는 방식이다. 걸쭉하고 고소한 국물이 두드러진다. 오리고기를 먹기 전 보통 생선 매운탕 등에 들어가는 미나리를 끓는 육수에 데쳐 먹는 것도 눈에 띄는 특징이다. 광주에는 이런 오리탕을 판매하는 음식점들이 모여 있는 ‘광주오리요리거리’가 있다. 광주역 앞 북구 유동에 위치한 이곳에는 약 30년 전부터 하나둘 오리탕 집들이 생겼다고 한다. 지금도 20여 개의 음식점들이 성업 중에 있다. 서울에서도 이 광주식 오리탕을 먹을 수 있는 곳이 있다. 무더위가 아직 가시지 않은 10일 광진구의 한 오리 음식점을 찾았다.
◆미나리, 들깨, 오리…거부할 수 없는 보양 콜라보= 이곳은 광주의 맛을 그대로 옮겨 왔다는 점을 강조하는 집이다. 실제 광주오리거리에는 동일한 상호의 오리 음식점이 있다. 서울에 낸 분점인 셈이다. 가게 문에는 ‘당기시오’라는 말 대신 ‘땡겨부러’라는 말이 적혀 있다. 입구부터 광주의 냄새가 확 풍겨 온다. 오리탕은 한 마리가 들어가는 대(大)자와 반 마리가 들어가는 중(中)자가 있다. 두 명이서 중자를 먹으면 충분하다.
주문을 하자 한참이 지나 조리가 다 된 오리탕이 큰 뚝배기에 담겨 나왔다. 테이블마다 있는 가스버너에서 다시 한소끔 끓여내면 바로 먹을 수 있다. 생 미나리도 한가득 딸려왔다. 국물이 조금 끓으면 미나리를 한 움큼씩 넣고 살짝 익혀 먹으면 된다. 이 오리탕의 특징은 본격적으로 오리고기를 뜯기 전 미나리가 애피타이저 역할을 한다는 점이다. 그 만큼 오리탕 국물에 데친 미나리는 하나의 요리라고 해도 부족함이 없는 맛을 선사한다. 데친 미나리를 초고추장에 들깨가루를 첨가한 특제 양념에 찍어먹으니 풍미가 더욱 살아났다.
미나리는 달면서도 쌉싸름한 맛과 짙은 향이 특징이다. 살짝 비리다고 느낄 수 있는 오리고기와 환상의 호흡을 자랑한다. 삼겹살처럼 기름기가 많은 돼지고기와도 궁합이 잘 맞는다. 각종 비타민과 무기질, 섬유질이 풍부한 알칼리성 식품으로 해독에도 좋다. 간 활동을 도와 숙취해소에도 좋고, 혈액을 정화시키는 기능이 있어 콜레스테롤 수치를 낮추는 효과도 있다. 소쿠리에 가득 담긴 미나리를 연신 데쳐 먹었더니 금세 바닥을 보였다. 미나리는 따로 추가할 수 있는데 기다리고 있는 오리가 아니라면 몇 번이고 추가를 하고 싶은 맛이었다.
미나리 다음으로는 들깨 갈아 만든 국물이 자연스럽게 입안을 가득 채운다. 꽤나 걸쭉해 보이는데, 막상 한 숟가락 입 안에 넣으면 목구멍을 타고 쑥 내려간다. 오리고기에 많이 함유된 기름 덕분이다. 들깨는 미나리처럼 향이 짙은 재료지만 자신의 맛을 마냥 앞세우지만은 않는다. 그러면서도 특유의 고소한 맛을 더해준다. 들깨 역시 불포화지방산을 많이 함유하고 있으며 비타민이 풍부하다. ‘동의보감’에 따르면 들깨는 성질이 따뜻하고 독이 없으며 간을 윤택하게 해주고, 몸속의 독소를 제거하며 혈액을 깨끗이 해준다.
미나리와 들깨 국물을 먹다 보면 이미 오리고기를 먹지 않아도 충분히 보양을 한 느낌이다. 하지만 점차 모습을 드러내는 고기 토막의 존재감은 예사롭지 않았다. 자주 먹는 닭과 달리 매우 크고 실했다. 특히 오리다리는 일반 닭다리에 두 배라 해도 될 법했다. 다리를 하나 들어 살을 뜯으니 무척 부드러웠고, 가슴살은 쫀득쫀득한 맛이 일품이었다. 미나리를 찍어 먹던 소스는 이 오리고기를 만나 온전히 자신의 색깔을 드러냈다. 아껴뒀던 미나리로 고기를 싸 이 소스에 찍어 먹었더니 그 맛은 정점에 이르렀다. 고기를 먹고 나서 남은 국물은 밥 한 공기와 함께 뱃속으로 사라졌다. 오늘 제대로 보양을 했다며 오리발이라도 잡고 흔들고 싶은 심정이었다.
김철현 기자 kch@asiae.co.kr
권성회 기자 street@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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