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 출생 - 숨이 턱턱 막히는 염천(炎天) 땡볕 난리통에 미안하다, 잠시 자축해야겠다. 7월17일이 생일이었다. 올해로 114년, 어느덧 1세기가 훌쩍 지났다. 그새 집집마다 파고들어 세속에 귀의했다. 자연을 이겨내겠다는 인류의 집념이 나를 잉태했다면 과학기술의 웅대한 도전은 나를 탄생시켰다. 1902년 7월17일 윌리스 캐리어가 기온을 낮추고 습기를 없애는 장치를 개발해 뉴욕 브루클린의 어느 인쇄소에 설치했다. 더위와 습기로 인쇄가 엉망이 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에어컨 역사의 시작이었다.
② 회상 - '더위와의 전쟁'에 대한 인류역사는 장대하다. 로마 황제들은 저 먼 설산(雪山)에서 눈을 가져와 한기(寒氣)를 즐겼다. 황제의 심부름꾼들은 전차를 타고 이탈리아 북부 알프스 중턱까지 달려가서 얼음을 가득 싣고는 녹기 전에 돌아오느라 눈썹을 휘날렸다. 8세기 바그다드의 권력자들은 이중벽이 있는 공간에 눈과 얼음 덩어리를 쟁여놓고 몸종들에게 부채질을 시켰다. 부채질 속도에 반비례해 불호령이 난무했다. 삼국유사에는 신라 3대 유리왕 때 얼음 창고를 지어 나라님의 더위와 갈증을 해소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때 그 시절 얼음은 권력의 상징이었다. 그렇다면 지금의 에어컨은? 자본의 징표일까, 안락의 표식일까. 아니면 서민이라는 착시일까.
③ 신세 - 가전제품으로 분류하자면 텔레비전, 냉장고, 전기밥솥 따위와 동급이지만 사용 빈도는 현저히 낮다. 24시간 작동하는 냉장고와 전기밥솥, 틈만 나면 깜박대는 텔레비전과 달리 에어컨은 여름 한철이다. 그마저도 전기요금 때문에 찬밥신세다. 그런 처지가 러닝머신을 닮았다. 처음에는 쭉쭉 빵빵한 몸매를 꿈꿔보지만 며칠 지나지 않아 빨래걸이로 전락하는 신세나, 전기요금 무서워서 그림자 취급당하는 신세나 서럽기는 마찬가지다.
④ 모순 - 이게 다 누진제 때문이다. 많이 쓸수록 비싼 요금을 물리겠다는 취지인데 시대착오적이다. 지금의 누진제는 1973년 오일쇼크가 발단이었다. 귀한 전기이니 가정보다는 산업현장에서 좀 더 싸게 사용하게 하자는, 일방적이고 획일적인 새마을정신에 입각한 결단이었다. 그때는 가전제품이래 봤자 텔레비전이 있을까 말까. 지금은 냉장고에 세탁기에 청소기까지 세상이 천지개벽했지만 정부는 여전히 40여 년 전에 머물러 있다. 상대적으로 저렴한 전기요금으로 생산한 에어컨을 턱없이 비싼 요금으로 쓸까 말까 고민해야 하는 아이러니라니. 여름에는 전기요금 무서워 벌벌거리다가 찬바람 불면 곧바로 잊히고 마는 씁쓸한 신세라니. 다만 오늘도 열대아에 잠못 이루고 뒤척이는 꼴이라니. 아직도 우리는 70년대 똘이장군 시대에 살고있나보다.
* 기록적인 폭염도 말이 안되고, 전기요금 폭탄도 말이 안되고, 누진제에 대한 정부의 독선은 더더욱 말이 안되고. 에어컨을 의인화(擬人化)해서 서민들의 신세를 한탄하는 것이 차라리 말이 되는 2016년 8월 폭염의 어느 날.
이정일 산업부장 jaylee@asiae.co.kr<후소(後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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