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섬스토리 - 소세양 판서가 프리스타일 명월과 딱 한달 연애를 장담했는데...
[아시아경제 이상국 기자]
어렸을 때부터 당시(唐詩)를 익혔던 황진이는 한시에도 능했다. 그런데, 옥봉이나 운초, 혹은 매창처럼 많은 시를 남기지 않았다. 시조의 풍격(風格)으로 보면, 마음의 거문고(심금)를 울리는 시들이 많았을 것 같은데 감질나게도 몇 편만 겨우 전해지니 아쉽기 그지 없다. 사후에 그녀의 시를 거둬주는 사람이 없어서였을까. 죽을 때 황진이는 집안 사람에게 이렇게 부탁했다.
“저는 천하 남자를 위하여 자신을 사랑할 수 없다가 이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만일 제가 죽거든 비단도 관도 쓰지 말고, 옛 동문 밖 물가 모래밭에 시신을 내버려서 개미와 땅강아지, 여우와 살쾡이가 내 살을 뜯어먹어, 세상 여자들로 하여금 저를 경계삼도록 해주십시오.”
집안사람은 그녀의 말대로 했는데, 어떤 남자가 그 시신을 거두어 장단(長湍) 구정고개 남쪽에 묻었다고 한다. <‘송도인물지’에서> 이렇게 자신의 육신을 물가 모래밭에 내던지라고 한 여인이니 굳이 시를 남기려는 뜻을 품지 않았을 것이다. ‘천하 남자를 위하여 자신을 사랑할 수 없’었다는 말은 여운을 남긴다.
육신이 한 사내에게 얽매이는 것을 그토록 경계했던 그녀는, 천하 남자들을 위하여 흔연히 자신을 개방했다. 그녀는 바다를 지나가는 모든 배를 비춰주는 등대처럼 조선 사회의 ‘공공재(公共財)’인 자신을 아낌없이 내놓았다. 하지만 그렇게 살았다 하더라도 후회는 또 후회대로 남는 법인가 보다. 다른 여인들에게 자신을 경계삼도록 죽은 몸뚱이마저 모래바닥에 내팽개쳤다.
천하 남자를 위하여 살던 사람이라지만, 각별한 남자가 없었던 건 아니다. 그 중에서도 소세양(蘇世讓, 1486~1562)은 ‘30일 동거 게임’으로 입방아에 오른 진이의 연인이다. 임방의 ‘수촌만록(水村漫錄)’에 전하는 이야기다.
소세양은 양곡(陽谷) 퇴재(退齋) 퇴휴당(退休堂)이란 호를 썼으며 전라도 관찰사와 형조, 호조, 병조, 이조 판서를 지냈고 좌찬성에까지 오른 인물이다. 율시(律詩)에 능한 시인이며 송설체를 잘 쓰는 명필로 소문났던 익산 출신의 정치인이다. 그는 인종 1년(1545년)에 당시 권신이던 윤임 일파의 탄핵을 받고 쫓겨났다가 그해 일어난 을사사화로 복귀했다. 대윤(윤임)과 소윤(윤형원)의 갈등이 사화를 빚어냈던 종종-인종-명종 대의 정치적 혼란기를 살았던 그에 관한 정치적 평가는 여기서 섣불리 내릴 수는 없다. 다만 그가 감성이 풍부하면서도 강직한 면모가 있었다는 점은 확인할 수 있다. 그는 ‘젊은 시절’ 이렇게 호언했다 한다.
“사내가 여색에 빠진다면 사내라 할 수 있겠는가.”
그러자 그에게 한 친구가 껄껄 웃으며 말했다. “여색도 여색 나름일세. 자네는 송도 기생 황진이가 와도 나무토막처럼 있을 수 있을까?”
그러자 그는 말한다. “나는 내가 계집 앞에 나무토막처럼 있는다고 말하지 않았네. 다만 내 욕망을 내가 조절할 수 있다는 뜻이네. 약속을 하나 하겠네. 내가 송도의 명월(明月)이를 명월이 뜨는 날 만나서 그 다음 명월이 뜨는 밤에 헤어지겠네. 하루도 어김없이 돌아서 나올테니 두고 보게.”
“허허. 만약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어쩔 셈인가?”
“그렇다면 나는 사람도 사내도 아닐세.”
이상국 기자 isomi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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