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 '난', 나타샤 '자야'...엄혹한 식민지 속, 시심과 지성의 연애는 100℃였던 그의 탄생 104주년
[아시아경제 김희윤 작가]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어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어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찬다”
- 백석의 시 <흰 바람 벽이 있어> 중에서
세상은 잘생기고 똑똑하고 능력 있는 남자를 가만두지 않는다. 공부보다 문학에 관심이 많아 수업은 뒷전이었는데도 성적은 늘 상위권이었고, 집안 형편이 어려워 대학진학이 어렵게 되자 광산거부의 후원으로 일본에서도 가장 학비가 비싼 대학의 영문과로 유학까지 다녀온 사내, 모던보이 백석(1912-1996)은 104년 전 7월1일 평안북도 정주군에서 태어났다.
백석에게 고향 ‘정주’는 남다른 의미를 지녔던 모양이다. 그는 1935년 조선일보에 시 ‘정주성’을 발표하며 등단했고, 그의 다른 시에도 왕왕 등장해 화자의 그리움을 자아내는 곳. 그가 만약 북녘이 아니라 남쪽, 이를테면 그가 너무도 사랑했던 첫사랑 ‘란’의 고향 통영쯤에서 태어났다면. 허망하게 첫사랑을 놓치지도 않았을 테고, 해방 이후 고향서 쭉 머무르다 전쟁이 끝나고는 남녘을 대표하는 시인이 되지 않았을까? 식민조선 최고의 모던보이에서 초로의 협동농장 일꾼으로 생을 마감한 그의 마지막 사진을 보고 있자니 허튼 상상이 이내 망상이 되어 감광막 속 깊이 팬 그 주름 사이로 내려앉는다.
첫사랑, 란(蘭)
일본 아오야마학원 전문부 영어사범과를 졸업하고 귀국한 이듬해 1935년, 그는 절친한 친구 허준의 결혼식에서 운명적인 여인을 마주하고는 단숨에 사랑에 빠졌다. 통영 출신의 이화고보 학생 박경련, 그녀의 이름조차 부를 수 없어 그녀를 란 이라 지칭하며 짝사랑에 빠져든 백석은 그다음 해인 1936년 1월, 3월, 12월에 걸쳐 그녀의 고향 통영에 세 번을 찾아가지만 정작 박경련의 집엔 가보지도 못한 채 근처만 맴돌다 돌아왔다.
“내가 들은 마산(馬山) 객주(客主)집의 어린 딸은 난(蘭)이라는 이 같고
난(蘭)이라는 이는 명정(明井)골에 산다든데
명정(明井)골은 산을 넘어 동백(冬栢)나무 푸르른
감로(甘露)같은 물이 솟는 명정(明井)샘이 있는 마을인데
샘터엔 오구작작 물을 긷는 처녀며 새악시들 가운데 내가 좋아하는 그이가 있을 것만 같고
내가 좋아하는 그이는 푸른 가지 붉게붉게 동백꽃 피는 철엔 타관 시집을 갈 것만 같은데“
- 백석의 시, <통영2> 중에서
그가 이 시를 발표한 것은 1936년 1월 23일. 당시 그가 근무하던 조선일보를 통해서였는데, 백석은 그해 4월 사직서를 제출하고 함흥 영생고보 영어 교사직으로 자리를 옮겼다. 12월엔 조선일보 시절 동료 신현중과 함께 통영을 찾아 란의 어머니를 설득하고자 했으나 되려 이때 란을 본 신현중의 마음이 흔들렸고, 이들은 5개월 뒤인 1937년 4월 양가 축복 속에 결혼식을 올렸다. 자신은 그토록 반대했던 박경련의 모친이 동료 신현중에게 그토록 관대할 수 있었나, 자신의 사랑을 누구보다 잘 알던 두 남녀의 결혼 소식은 백석에겐 큰 충격일 수밖에 없었다.
막다른 곳에서 만난 여인, 자야(子夜)
통영발 ‘잘못된 만남’으로 실의에 빠져있던 백석은 1937년 어느 날, 영생교보 선생님들과의 회식자리에서 아름다운 기생 진향을 보고 마음이 설레 평소 입에도 잘 안 대던 술을 대취하도록 들이켰다. 이후 자연스럽게 만나게 된 두 사람. 어느 날 진향이 서점에 들러 당나라 시를 모은 책을 백석에게 선물했는데, 책에 실린 이태백의 ‘자야오가(子夜吳歌)’에서 딴 ‘자야’란 이름을 그녀에게 붙여주었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 백석의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중에서
이후 백석과 자야는 서로 간의 사정으로 몇 차례 이별과 재회를 반복했는데, 그 사이 백석은 두 번의 혼인을 하고도 자야에게 태연히 돌아왔고, 경성 청진동에서 즐거운 한 때를 보내다가도 별안간 연락을 뚝 끊고 통영으로 외유를 다녀오기도 했다.
사랑으로 살아냈던 사내
백석은 자야의 직업을 문제로 극심히 반대하던 가족의 성화에 경성을 떠나 만주를 헤매다 해방 후 평양으로 돌아왔다. 오산고보 재학시절 은사였던 독립운동가 조만식을 도와 통역과 비서 업무를 수행 중이던 1946년, 그의 곁엔 자야가 아닌 평양 권번 소속의 기생이 있었다.
이내 남북 간 갈등이 고조되자 이화여전 출신의 첫 번째 부인 문경옥은 외아들을 데리고 백석에게 절대 따라오지 말 것을 종용하며 월남해버렸고, 백석은 평양에 남아 분단을 맞았다. 이후 그의 행적을 놓고 많은 추측이 난무했으나, 산세가 험한 삼수군(삼수갑산의 ‘삼수’)에서 1962년부터 1995년 사망할 때까지 삼수농장의 농부로 생을 마감했음을 그의 세 번째 부인이자 미망인인 리윤희 씨가 증언한 바 있다.
백석과 동시대에 북한에 남아 문학 활동을 이어간 많은 작가들은 숙청의 칼날에 흩날렸지만, 그는 펜을 내려놓고 도리깨를 잡은 채 33년 간 시인이 아닌 농부로 자신의 삶을 살아냈다. 이루지 못한 사랑, 이뤄야 했던 사랑, 이루고 지킨 사랑. 그의 삶을 스쳐 지나간 여인은 여럿이었지만 그의 가슴엔 사랑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겐 그의 문장이 남아 엄혹했던 식민 조선에도 뜨거운 청춘과 애련한 마음들이 부유하는 낭만이 있었음을 전하고 있다.
“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 또,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
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 끝에 헤매이었다.”
- 백석의 시,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중에서
김희윤 작가 film4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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