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서 마약제조, 중국 공안에 덜미…"'곤궁한 생활', 가장 책임감 때문에 범행"
[아시아경제 류정민 기자]
최고의 첩보영화로 꼽히는 ‘본’ 시리즈의 주인공 맷 데이먼은 말 그대로 인간 비밀병기다. 최고를 자부하는 첩보기관의 추적을 보란 듯이 따돌리며 임무(?)를 완수한다. 탁월한 운동 능력, 반사 신경, 뛰어난 두뇌까지 부족함이 없는 특수 요원이다.
한국 수사기관에 붙잡힌 특수요원(?)이 있다. 맷 데이먼이 영화 속 인물이라면 이 사건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실존 인물이다. 1명도 아니고 3명이다. 그들의 임무는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 암살이다.
황장엽 전 비서는 북한에서 내려온 최고위직 인물로 손꼽히던 존재였다. 황장엽 전 비서의 안전은 중요할 수밖에 없는 사안이었다. 한국의 관련 기관이 황장엽 전 비서가 위험한 상황에 놓이도록 방치할 리가 없다는 얘기다.
국가정보원 등 관련 기관의 감시망을 뚫고 황장엽 전 비서 암살을 시도하려면 본 시리즈 주인공 정도의 능력은 뒤따라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문제의 3인방은 건장한 신체와 근육질의 운동 능력을 지닌 이들과는 거리가 있다. 그들은 ‘할배(할아버지의 방언)’들이다. 핵심인물인 A씨는 택배기사 출신이다. 나이는 환갑을 훌쩍 넘은 65세다. A씨를 위험한(?) 작전에 끌어들인 B씨는 70세가 넘었다. 한국 나이로 71세다. 이들과 함께 한 C씨는 그나마 가장 어린(?) 58세다.
그들의 첫 번째 미션은 황장엽 전 비서 암살이 아니었다. 북한에서 메트암페타민(필로폰)을 제조해 돈을 버는 것이었다. B씨는 1997년 북한 공작원을 만나 엉뚱한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B씨는 A씨와 C씨를 끌어들였다. 이들이 필로폰 제조에 필요한 기술과 장비, 물품을 제공하고 북한은 장소를 제공하는 방식이다. 그들이 선택한 장소는 북한 황해도 사리원의 어느 공간이었다.
그들은 2000년께 약 60㎏의 필로폰을 제조한 것으로 알려졌다. 필로폰 60㎏은 200만회 투약이 가능한 어마어마한 양이다. 그들은 25㎏ 정도의 필로폰을 북한에 넘기고 자신들이 남은 몫을 챙긴 것으로 조사됐다.
그들은 이제 마약 거래로 엄청난 부자가 됐을까. 그들의 어설픈 작전은 성사되지 못했다. 2015년 그들은 국가보안법 위반, 마약류관리에관한법률위반(향정) 등의 혐의로 1심 재판을 받게 된다. 서울중앙지법은 판결문을 통해 이렇게 밝혔다.
“피고인들이 그 몫으로 받은 필로폰은 중국 공안에 압수되어 몰수된 덕에 실제로 유통되지는 않았다. 북한 몫 필로폰 또한 국내로 유입되어 유통되었다고 인정할 만한 증거가 없다. 피고인들이 이 범행으로 실제 얻은 경제적 이익이 없다.”
그들의 위험한(?) 작전은 마약제조 뿐만이 아니었다. 황장엽 전 비서의 암살이라는 특수 지령을 하달 받고 작전에 돌입한다. B씨는 2009년 북한 공작원에게 이러한 임무를 하달 받고, 황장엽 전 비서의 거주지와 생활 동선에 대한 파악에 나섰다.
조직폭력배에게 돈을 줘서 암살을 시도할 계획도 세웠다. 그렇게 2010년까지 황장엽 암살이라는 임무를 수행하고자 힘을 쏟았다. 하지만 황장엽 전 비서가 2010년 10월 노환으로 사망해 암살 공작이 실제로 이뤄지지는 않았다.
A씨 등은 지난해 5월 구속 기소됐다. 그들은 필로폰을 제조했지만, 중국 공안에 압수돼 유통시키지 못했다. 황장엽 전 비서 암살 계획도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그들의 비밀작전은 결국 실패로 끝났다.
수사기관에 적발된 그들의 무용담은 뭔가 어설픈 측면이 있다. 조폭을 동원해 황장엽 전 비서 암살에 나선다는 발상도 은밀하고 철저한 계획을 준비할 것 같은 특수요원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그들은 결국 대법원에서 징역 6년에서 9년까지 실형을 선고받았다. 그들에게 주어진 엄청난 임무에 비교할 때는 형량이 높다고 보기는 어렵다. 어쨌건 그들에 대한 검찰 기소는 이뤄졌고, 법원의 판단은 끝났다.
법원은 징역 9년을 선고받은 B씨의 양형 이유에 대해 이렇게 밝혔다.
“피고인은 필로폰 제조 범행 전부터 현재까지 경제적으로 곤궁한 생활을 해온 것으로 보인다. 가장으로서의 책임감 때문에 판시 각 범행 제의를 받아들였다는 피고인 변소를 완전히 배척하기는 어렵다.…피고인은 잘못을 인정하고 반성하고 있다. 가벼운 벌금형 전과만 있다. 가족들이 선처를 탄원하고 있다.”
류정민 기자 jmryu@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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