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김효진 기자] '5일간 무료로 칼 갈아 드립니다.' 술을 한 잔 걸쳐 얼큰해진 박모씨(74)의 눈에 이런 문구가 적힌 입간판은 적잖이 거슬렸다.
박씨에게는 이게 "이제 그만 시장을 떠나라"는 통보로 보였다. 며칠 뒤 낮술에 취한 박씨는 다시 그 문구를 떠올렸다.
화를 참지 못 한 박씨는 입간판을 세운 가게 주인 A씨에게 달려들어 칼을 휘둘렀다. 박씨는 주변 상인들에게 칼을 빼앗기자 주먹질을 해댔다.
A씨는 박씨의 주먹질에 타박상을 입었고 박씨는 현행범으로 경찰에 체포됐다. 2014년 6월, 서울 동대문구의 한 시장에서 벌어진 일이다.
박씨는 시장 칼장수였다. 전라남도 함평에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난 박씨는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해 읽고 쓰는 법도 익힐 수 없었다.
그는 스무 살에 상경해 영등포시장에서 상인들의 칼을 갈아주거나 파는 일을 시작했다. 1970년엔 동대문의 시장으로 터전을 옮겨 역시 칼장수로 일했다.
칼장수로 일한 40여년. 그사이 박씨는 시장에서 일하던 처녀와 결혼해 가정을 꾸렸고, 최근까지 90대 노모를 부양했다.
고향 마을을 점령한 빨치산 때문에 피란을 다니고 먹고살기 위해 부잣집 머슴으로 일했던 박씨에게 '칼'은 제2의 인생 그 자체였다.
하루에 보통 2~3만원, 많아야 5만원 남짓이었던 수입으로도 꿋꿋이 버텨낸 박씨였다. 박씨 곁에는 늘 남루한 손수레가 자리하고 있었다.
이런 박씨에게 2010년 갑자기 시장에 등장한 A씨는 불편한 존재였다. A씨 역시 별다를 것 없는 영세 상인이었으나 어딘지 모르게 달라보였다.
좌판에 깔아둔 고급 외제 칼, 3000만원이나 한다는 칼갈이 기계는 늘 박씨 비위를 상하게 했다.
가뜩이나 속이 쓰렸던 박씨에게 '5일간 무료로 칼 갈아 드립니다'라는 문구는 위협이자 선전포고였던 셈이다.
칼부림과 주먹다짐의 대가로 박씨는 재판에 넘겨졌다. 그에게 적용된 혐의는 살인미수. 힘겹게 지탱해 온 지난 수 십년이 이 네 글자로 순식간에 얼룩졌다.
지난 1월 1심 재판 때 박씨는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제정신이 아니었다"고 호소했다.
1심을 맡은 서울북부지법 형사13부(이효두 부장판사)는 "박씨가 술에 취해 있었지만 의사결정이 불가능한 상태였다고 보이지는 않는다"며 징역 1년6개월 실형을 선고했다.
"A씨도 박씨와 마찬가지로 일흔에 가까운 고령일뿐더러 영세상인에 불과한데 박씨는 상대적 박탈감에 휩싸여 극히 위험한 범행을 저질렀다"는 게 재판부의 판단이었다.
항소심 재판부의 판단은 달랐다.
서울고법 형사5부(윤준 부장판사)는 실형을 선고한 원심 판단을 깨고 징역 1년6개월, 집행유예 3년을 선고했다고 13일 밝혔다. 이 판결로 박씨는 석방됐다.
박씨는 항소심 재판에서 ▲앞으로는 술을 마시지 않을 것 ▲다시는 칼을 만지지 않을 것 ▲A씨 근처에 가지 않을 것을 약속했다.
사과와 반성 끝에 A씨와도 원만하게 합의했다. 항소심 재판부는 이런 모든 정황을 유리한 정상으로 인정했다.
"피해자와 합의에 이르렀고 박씨가 고령인 데다 건강도 좋지 않은 점 등을 감안하면 원심(1심)이 선고한 형은 박씨의 책임 정도에 비해 다소 무겁다"는 것이다.
김효진 기자 hjn2529@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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