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리콘밸리 모방 대신, 배울건 배우고 삼성만의 문화 만들어
[아시아경제 명진규 기자] 극적인 회장 승진도, 세간을 떠들썩하게 할 만한 비전 선포도 없다. 그저 묵묵히 조직을 변화시키며 삼성의 체질을 다지고 있다.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병환으로 입원하며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삼성그룹 경영 전면에 나선 지 2년이 지났다. 회장직 승계부터 이 회장의 '신경영'에 준하는 이 부회장의 비전 선포 등 지난 2년간 수많은 예측이 오갔지만 모두 빗나갔다. 앞으로도 없을 예정이다.
이 회장이 와병 중인 상황에서 승계나 승계에 준하는 작업인 비전 선포를 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는 것이 이 부회장의 심중이다. 그런 만큼 이 부회장은 조용하지만 실존적인 변화, 보텀업 방식의 혁신, 조직의 자발적인 개혁을 수차례 주문하고 있다.
지난 2년간 삼성그룹은 이 부회장의 이 같은 주문에 따라 혁신과 개혁의 행보를 이어갔다. 글로벌 경기 위축에도 불구하고 올해 1분기 삼성전자가 영업이익 6조6800억원의 깜짝 실적을 낸 배경에도 이 부회장의 선제적인 혁신과 구조조정에서 비롯됐다는 평가다.
일각에서는 이 부회장이 어떤 비전을 내놓을까 주목하지만, 이 부회장은 거창한 비전이 아니라 실질적인 변화에 주력하고 있는 중이다.
이 부회장은 또한 실리콘밸리를 주목하면서도 모방하진 않는다. 이미 벤처 기업이 아닌 삼성이 벤처 기업을 따라 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고 비현실적이라는 판단에서다. 다만 저들의 성공 DNA인 혁신과 개혁을 기반으로 하는 삼성만의 문화를 만들자는 것이다.
삼성그룹 관계자는 "삼성전자와 실리콘밸리의 벤처 기업은 문화나 근무 방식 모든 것이 다를 수밖에 없다"면서 "이 부회장의 의견은 실리콘밸리에서 무수한 아이디어와 신기술들이 탄생하는 것처럼 그 혁신과 창업 정신을 배우자는 것"이라고 말했다.
실천 방법은 단순 명료하다. 자신이 솔선수범해서 경영진을 변화시키고 임직원들이 스스로 체질을 다져나가도록 하는 것이다. 솔선수범은 곳곳에서 눈에 띈다. 이 부회장은 경영 전면에 나선 뒤 자신에 대한 모든 의전을 중지시키며 최고위 경영진들의 기존 의전관행을 개선하라고 지시했다. 급하게 출장을 떠날 때 좌석이 없으면 이코노미석을 타기도 한다.
사업장 방문 시 관련 임원들이 도열해 기다리던 풍경도 사라졌다. 오히려 이 부회장이 먼저 도착해 동행 임원들을 챙긴다. 대부분의 사업장에서 VIP 방문 시 진행하던 의전은 이제 사라졌다. 해외 출장 시 만사를 제쳐 놓고 배웅을 나가거나 출장지에서 고위 경영진들이 줄을 서던 문화도 사라졌다.
그룹 전 계열사가 실시한 경비절감 노력의 출발도 이 부회장이다. 삼성전자에서 보유하고 있던 전용기와 헬기를 불요불급한 자산이라며 매각을 지시했다. 이후 각 계열사마다 불요불급한 자산을 정리하는 등 강도 높은 비용 절감책 등이 실시됐다.
삼성 계열사 고위 관계자는 "의미 없는 구호를 외치기보다 이 부회장이 솔선수범해 실천하고 최고위 경영진들이 이에 호응하는 형태로 조용한 변화가 이뤄지고 있다"면서 "지난 2년간 삼성전자와 주요 계열사들의 기업 문화가 바뀐 점을 돌아보면 조용했지만 수십 년간 이어져온 관행들이 많이 바뀐 것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명진규 기자 aeo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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