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오현길 기자] 해운·조선을 시작으로 부실업종 구조조정이 본 궤도에 오르면서 정부 역할에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일방적으로 밀어붙이기 식의 산업 구조조정 대신 채권단을 중심으로 썩은 곳을 도려내는 방식을 띄고 있다. 정부는 신속성을 떨어져 장기화 되더라도 부작용을 최소화하겠다는 방침이다.
28일 관련 부처에 따르면 4·13 총선이 지난 이후 정부는 구조조정 작업을 주도적으로 추진하는 양상을 보였다. '여소야대'라는 결과를 낳았지만 구조조정을 더 이상 늦출 수 없다는 긴박감이 나타났다.
유일호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도 총선이 끝난 이틀 뒤인 15일 "구조조정을 직접 챙기겠다"며 속도감있는 구조조정을 예고했다. 그 이후 여야가 한 목소리로 구조조정에 동의를 하면서 탄력을 받게 됐다.
그러나 불과 열흘이 지난 25일 유 부총리는 "직접적으로는 채권단과 기업의 조치와 노력이 우선돼야 하고 정부는 구조조정이 잘 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역할을 다할 필요가 있다"고 미묘한 입장변화를 나타냈다. 기업의 명줄을 정부가 아닌 채권단을 중심으로 시장에 맡기겠다는 선언이었다.
1998년 외환위기 때처럼 인수·합병(M&A)을 포함한 정부 주도 구조조정 시나리오가 나올 것이라던 기대감은 당혹스러움으로 바뀌었다. 해운 양대 선사를 합병하거나 대형 조선사와 중소선사의 수를 줄일 것이라는 예측이 제기됐지만 모두 헛다리를 짚은 격이 된 셈이다.
지난 1998년 세계통화기금(IMF) 구제금융을 받았을 때와는 정부의 조치와 비교하면 상전벽해 수준이다. 당시 정부는 재계를 대상으로 빅딜을 종용하면서 현대전자와 LG반도체가 통합됐고, 한화의 정유 사업을 현대가 인수하게 됐다. 기아자동차도 현대자동차로 넘어가기도 했다. 재계 2위를 자랑하던 대우그룹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계기가 됐다. 원칙과 소통이 부재하면서 재계는 거세게 반발했지만 정부의 입김을 피해갈 수는 없었다.
반면 이번 구조조정을 관통하는 원칙은 '시장'과 '법'이다. 부실 채권을 보유하고 있는 금융기관을 중심으로 채권단을 구성해 부실을 정리하는 시장원리가 작동하고 있다. 여기에 기업 구조조정 촉진법과 기업 활력 제고법이 곁들어지고 있다. 이러한 내용은 임종룡 금융위원장이 밝힌 '구조조정 3트랙' 원칙으로 구체화됐다.
제1트랙이 현재 취약업종으로 꼽히는 해운과 조선을 겨냥하고 있으며, 제2트랙은 상시적 구조조정에 해당하며 제3트랙은 공급과잉 업종에 대한 선제적 구조조정을 목표로 하고 있다.
스케줄도 순차적으로 제시됐다. 다음달까지 해운사 용선료 협상이 데드라인으로 주어지면서 상반기내에 결론이 나올 것으로 예상된다. 또 오는 8월 기활법 시행에 맞춰 공급과잉 업종에 대한 연구보고서를 갖고 하반기 구조조정이 진행될 예정이다. 당장 결론이 나올 수 없는 장기전에 돌입하는 모양새다.
기재부 관계자는 "인위적인 요인을 최대한 줄이고 법과 원칙에 따라 구조조정을 한다는 것이 정부 방침"이라며 "다만 진행속도와 상황에 따라서 여러가지 방안을 고려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금융위원회 관계자도 "당장 기업 합병이나 청산 등에 나설 상황이 아니다"라며 "시장 중심으로 진행해야 하기 때문에 연말까지 갈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대비하고 있다"고 전했다.
세종=오현길 기자 ohk0414@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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