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윤의 '스타 총선후보 집중탐구' - 유승민, 朴의 손에 무당파가 되었으나
“탄생의 순간은 마치 우주의 대폭발과 비슷해서, 우리는 시인이 겪어왔던 괴로움의 내력과 기억들이 한 극점으로 응축되었다가 터지는 순간을 목격할 수 있다.”
문학평론가 강동호가 규정한 ‘탄생의 순간’을 ‘선거’로 잠깐 바꾸고, 시인의 자리에 정치인을 앉혀본다면, 이 문장은 유승민(무소속, 대구 동구을) 후보의 지난 몇 개월간을 대신하는 목격담처럼 읽힌다. 괴로움의 내력과 기억은 ‘학살’로 대변되는 공천권 논란으로 후보 등록 전날까지 그를 붙들었고, 그날 저녁 탈당선언으로 이 모든 감정이 응축되었다가 터지는 순간을 온 국민이 목격했다. 금번 새누리당 공천사태의 가장 큰 피해자는 어쩌면 유승민이 아니라, 권력욕이 저지른 지리한 쟁투에 피로감만 쌓인 국민들이 아니었을까. 대통령에게 '배신의 정치' 대상으로 낙인찍혀 지난해 7월 원내대표직 사퇴 후 4.13 총선 공천을 앞두고 사실상 출당조치에 무소속으로 도전, 복당을 통해 보수개혁을 이루겠다고 선언한 그의 전략엔 무엇이 숨어있는지 과거 유승민의 말(연설, 인터뷰)을 통해 살펴보고자 한다.
"짝퉁과 명품은 딱 보면 알 수 있지 않습니까!" - 2011. 7. 1 한나라당 강원 비전발표회
지금에야 대통령과 더없는 견원지간이 되었으나, 본래 유승민 후보는 원조 친박이자 진박 핵심인물이었다. 당시 그는 2012 총선을 앞두고 당권에 도전, 강원도의 유세장에서 "한 번도 박근혜를 배신 않고 곁에서 지켜온 저 유승민이 2012 총선을 승리로 이끌고 대선도 승리로 이끌어 정권 재창출을 반드시 이루겠다"고 외치며 스스로 ‘박근혜 수호신’을 자처했다. 2002년 대선에서 이회창 후보의 경제특보로 정계에 입문한 유 후보는 대선 패배 후 2004년 비례대표로 국회에 입성, 2005년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대표의 삼고초려로 비서실장직을 수행하며 대통령과 인연을 맺었다. 명품을 자처했던 그는, 그로부터 4년 뒤 박 대통령으로부터 ' 신뢰를 어기는 배신의 정치 ' 주체로 지목받아 짝퉁(?)으로 전락하는 수모를 겪는다.
"요즘같이 서민이 고통 받고 일자리가 부족한 시점에선 정부의 성장해법이 분명히 제시돼야 합니다." - 2004. 5. 20 MBC 100분 토론
노무현 정권 당시 토론프로그램에서 유 후보는 정부의 경제정책에 대한 비판의 날을 세웠다. 그는 10년 뒤 박근혜 정권의 경제정책 기조인 이른바 ‘초이노믹스’를 향해서도 더욱 날카로운 비판을 가했다. “단순한 규제완화 수준의 정책은 근본적 대책이 될 수 없다”고 지적했는가 하면, “증세 없는 복지는 허구”라는 발언으로 정부의 정책 기조를 정면 비판해 청와대와 껄끄러운 분위기를 연출했다. 2011년 한나라당 대표 출마선언에서는 “부자들은 돈이 많아 주체를 못 하는데, 가난한 사람들이 죽어가는 것을 내버려두는 것이 과연 보수입니까?” 물으며 사회 양극화에 대한 보수세력의 미온적 대처를 향해 일갈했는가 하면, 과거 한국개발연구원(KDI) 연구위원 재직 당시엔 재벌의 언론참여 제한, 재벌의 금융기관 지배 축소 등을 골자로 한 ‘공정거래부문 신경제 5개년 계획시안’(1993. 4. 29)을 발표하며 대기업의 성장에 제동을 거는 정책을 제안했다. 경제정책에 있어서만큼은 진보진영보다 더 진보적인 정책안을 줄곧 고수해온 것이 곧 유승민의 정체성이었다.
"제가 되면 콩가루 집안이 된다고 합니다." - 2015. 2. 2 새누리당 의원총회
새누리당 원내대표 경선을 앞두고 당시 유승민 후보와 경쟁하던 이주영(전 해수부 장관, 새누리당 창원시마산합포구) 후보는 당과 청와대를 향한 유 후보의 쓴소리에 “쓴소리만 하다 보면 노무현 정부와 열린우리당처럼 콩가루 집안이 된다”고 공격했고, 이에 유 후보는 “찹쌀떡을 만드는 찹쌀가루 집안을 만들겠다”고 맞받아치며 우려를 불식시켰다. 실제로 그의 집안은 명문가로 꼽히는데, 유 후보의 부친은 13대, 14대 국회의원을 지낸 유수호 전 의원으로 부산지법 부장판사로 재직 당시 개표조작 사건 유죄판결, 반정부시위 주모자 석방을 판결해 판사 재임용에 탈락했던 강직한 인물이었다. 유 후보 또한 1976년 대입 예비고사에서 전국 차석을 차지한 인재였고, 형인 유승정 변호사는 서울대 법대 졸업 후 판사를 지낸 법조인이다. 유승민 후보는 한 인터뷰에서 “아버지와 형제들이 모두 법조계 출신이라 재판 이야기만 하는 게 싫어 법만 아니면 된다는 생각에 경제학과에 지원했다”고 자신의 전공 선택에 얽힌 비화(?)를 털어놓기도 했다.
"이거 좀 정신 나간 짓 아닙니까?" - 2015. 8. 12 국회 국방위원회 현안보고
지난해 8월 4일 북한이 비무장지대(DMZ)에 설치한 목함지뢰에 우리 군 수색대원 2명이 다리가 절단되는 중상을 입은 사고가 발생했다. 얼마 뒤 열린 국회 국방위원회 현안보고에서 유 후보는 “현지 부대가 4일 북한의 도발로 잠정 결론을 냈는데 다음날 통일부 장관은 아무 일 없다는 듯 (북측에) 회담을 제안하다니, 정신 나간 짓 아니냐”고 정부의 미흡한 대응을 질타했다. 정부의 외교정책을 두고 유 후보가 쏟아낸 독설은 이뿐만이 아니다. 지난 2014년 10월 박 대통령의 방미일정 중 사전에 발언 자료가 배포됐다 취소된 내용을 두고는 “이거 누가 하는 거냐, 청와대 얼라들이 하는 거냐”라고 직격탄을 쐈는가 하면, 그해 국정감사에서는 국립외교원이 통일한국 발간자료로 통일부와 혼선을 빚은 것을 두고 “나라 돌아가는 꼴이 좀 우스운 것, 이상한 것 아니냐”고 힐난했다. 유 후보의 이 같은 행보를 놓고 이한구 새누리당 공천관리위원장은 지난 24일 기자회견을 통해 “4년 내내 국정 발목만 잡고 국가 위기 해결을 방해하던 야당에서는 박수갈채를 받고, 집권여당 의원들은 침묵시키는 행동을 하면서 어떻게 당 정체성 위반이 아니라 할 수 있냐”고 지적한 뒤 “(유 후보는) 입당 이래 꽃신 신고 꽃길만을 걸어왔다”고 비꼬았다. 부자(父子) 국회의원으로 여당 텃밭에서 3선을 기록한 중진의원의 행보가 당의 정강·정책과 다른 방향으로 향할 때, 지적과 성토가 아니라 행동과 실천으로 바뀔 때 기존의 당내 인사들이 느꼈을 일련의 불만과 배신감이 이번 공천사태로 한꺼번에 터진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제 정치생명을 걸고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고 규정한 헌법 1조 1항의 지엄한 가치를 지키고 싶었습니다." - 2015. 7. 8 새누리당 원내대표 사퇴 기자회견
지난해 4월 8일 국회 교섭단체 연설자로 나선 유 후보는 당시 새누리당 원내대표 신분으로 연단에서 “새누리당은 가진 자, 기득권 세력, 재벌 대기업의 편이 아니라, 고통 받는 서민 중산층의 편에 서겠다”고 선언한 뒤 “여와 야, 보수와 진보의 새로운 변화를 보면서 저는 ‘진영의 창조적 파괴’라는 꿈을 가진다”는 다소 파격적인 발언을 이어갔다. 아울러 ‘증세 없는 복지는 허구’, ‘ 양극화 해소를 시대의 과제로 제시한 노 전 대통령 통찰을 높이 평가 ’ , ‘단기부양책은 이제 과감히 버려야’ 등 정부의 주요 정책과 맞서는 발언을 거듭 쏟아낸 유 후보는 이날을 기점으로 당·청과 불편한 기류에 휩싸였고, 6월 25일 박 대통령의 "정치적으로 선거 수단으로 삼아서 당선된 후에 신뢰를 어기는 배신의 정치" 발언으로 낙인찍힌 뒤 13일 만인 7월 8일 원내대표직에서 사퇴했다. 그는 대통령의 발언을 의식한 듯 사퇴 기자회견에서 ‘헌법 제1조 1항’을 언급, 자신의 소신을 피력했다. 지난 24일 자신의 대구 선거사무소에서 새누리당 탈당 기자회견에서도 유승민 후보는 헌법 제1조 2항을 다시 언급했는데,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옵니다. 어떤 권력도 국민을 이길 수 없습니다”고 거듭 강조한 그는 “제가 동지들과 함께 당으로 돌아와서 보수개혁을 이룰 수 있도록 뜨거운 지지를 부탁한다”고 호소했다. 이후 당내 대구 공천 지형에 격변이 일었고,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의 이른바 ‘옥새 투쟁’에 힘입어 유승민 후보 지역구인 대구 동구는 무공천 지역으로 확정됐다.
“정치에 관심을 갖지 않고도 도덕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가?”
위 질문은 2013년 프랑스 바칼로레아(대입자격시험) 철학시험에 출제된 문제로, 대학 입학을 앞둔 청년에서부터 거동이 불편한 노인에 이르기까지 선거를 앞두고 참정권을 가진 우리 국민에게 던지는 무거운 메시지처럼 다가온다. 여당의 꼴사나운 공천다툼과 야권의 구태의연한 지역주의에 환멸을 느껴 국민이 정치를 멀리하는 작금의 상황에서 국면전환을 위해 곳곳에서 거론되는 ‘경제정책공약’은 허수하기 짝이 없는 면피용 발표에 불과하다. 개혁적 보수를 자처한 유승민이 선택할 수 있는 보수정당이 새누리당뿐인 대한민국의 현실은 우리가 정치에 무관심 해왔던 지난 시간이 만든 작고 좁은 우물이지만, 그는 당선 후 복당과 개혁 의지를 약속하며 그 안에서의 깊이와 높이를 구상하고 있다. 동상이몽. 좌표점이 어긋난 그의 다음 행보는 누구를, 그리고 어디를 향하고 있을까? 여야, 그리고 국민 모두가 주목하고 있다.
김희윤 작가 film4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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