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거리 서명 나선 朴에 대한 걱정들
[아시아경제 이상국 기자] 오늘자(1월 19일) 조간신문들은 첫 면에 일제히 대통령 사진을 내보냈다. 경기도 성남시 판교역 광장에서 열린 '민생구하기 입법 촉구 1000만 서명운동' 행사장에 직접 나와 펜을 들고 서명을 하는 장면이다. 대통령이 입법 청원을 압박하며 서명을 한 것은 역사상 유례가 없던 일이다. 박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국회에 노동개혁법과 경제활성화법을 통과시켜 달라고 했는데도 안 돼 너무 애가 탄다. 나도 이렇게 애가 타는데 당사자인 여러분의 심정은 어떻겠는가"라면서 "힘을 보태려 서명운동에 참여했다"고 밝혔다.
13일 북핵과 관련해 대국민 담화를 하는 자리에서도 국회의 법안 통과를 촉구하는데 많은 시간을 썼던 박대통령은, 어제인 19일의 기획재정부 업무 보고 자리에서도, 또 오후 중소기업인 신년회 인사자리에서도 파견근로자법 통과의 중요성을 역설한 바 있다. 틈만 나면 입버릇처럼 국회의 '태업'을 비판하던 그가 길거리에까지 나가 민간에서 벌이는 서명운동까지 참여한 것이다. 대통령의 이런 모습을 어떻게 봐야 할까. 정색을 하고 주요한 기사로 다룬 신문은 조선일보와 한겨레이다.
이날의 서명은 지난 13일 회견에서 "대통령과 행정부가 더 이상 어떻게 해야 되겠느냐. 이제 국민한테 직접 호소할 수 밖에 없지 않겠느냐"고 한 말에서 이미 예고된 바 있다. 국회를 건너뛰고 대국민 직접 정치를 해서라도 법안 통과를 얻어내겠다는 강한 의욕을 보인 셈이다. 대통령과 정부가 '서명'한 1000만 서명운동을 엔진 삼아 여당이 4월 총선을 앞둔 상황에서 야당을 압박해나갈 가능성도 있어서, 이 일을 하나의 해프닝으로만 보기도 어렵다. 오죽 답답하면 국민이 나서서 서명운동까지 벌일 것이며 또 오죽 답답하면 대통령이 서명에 참여까지 할까 하는 관점에서 보자면, 절박한 심정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서로 다른 논조를 보여온 조선일보와 한겨레가 이구동성으로 지적하는 게 있다는 점은 인상적이다. 한겨레는 야당의 비판을 인용해 "대통령으로서의 지위와 본분을 망각한 잘못된 판단이며, 대통령의 서명 참여가 국민 한 사람분의 서명으로 여겨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명백히 국회 압박"이라고 따진다. 윤평중 한신대 교수의 입을 빌어 "대통령의 간절한 마음을 이해할 여지는 있지만, 법안에 대한 의견이 엇갈리는 상황에서 일방의 국민서명까지 참여하는 것은 적절치 않아 보인다"고 못박았다. 또 조선일보는 강원택 서울대 교수와 이내영 고려대 교수의 말을 빌어 "대통령의 답답한 심정이나 진정성은 이해되지만 서명운동 동참은 의회 민주주의 시스템을 무시하고 국회를 압박하는 모양새밖에 되지 않으며, 서명운동에 기댄 것은 대통령 스스로 정치력 부재를 자인한 것"이라고 일침을 놓는다.
이 문제가 지닌 핵심은, '대통령의 위험한 내면'이다. 목적이 옳으면 법과 원칙을 벗어난 '비정상적'인 수단이나 절차도 문제 없다는, 그 판단이다. 3권 분립 하에서 국회의 의사결정 기능을 무시하고 행정부의 수반이 국민을 직접 업고 법안을 통과시키겠다는 발상은 대통령의 답답함이나 진실성으로 포장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근본적이며 심각하다. 국회 내 야당은 행정부나 대통령에게 대화와 협상의 파트너이지, 굴복을 시켜야할 적이 될 수는 없다. 대통령의 충정과 법안의 진정한 효과에 대한 야당의 몰이해가 원망스럽고 그에 따른 국가적 피해가 안타깝다 하더라도, 국회를 건너뛰고 야당을 비켜서 '국정'을 밀어붙일 수는 없다. 권력자의 그런 유혹이 독재의 비극을 만들어낸 역사적 기억을 떠올린다면 더더욱 그렇다. 대통령의 국정은 목표만큼이나 수단과 절차가 중요하다. 서명하러 갈 시간에, 국회에 한번 더 가서 '쓸모 없어 보일지 모르는' 설득을 간곡하게 한번 더 하는 게 낫지 않았을까.
이상국 기자 isomi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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