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와 질투 사이
지난 정부 때 기획재정부 장관을 지내고 산은그룹을 경영했던 강만수씨는, 한때 질투의 경제학이란 말을 써서 주목을 받았다. 일본 경제학자 다케우치 야스오의 '정의와 질투의 경제학'이란 책에서 영감을 받았던 것 같다. 그는 2004년 종합부동산세를 도입하려는 당시 참여정부의 움직임에 대해, '본말이 전도된, 질투의 경제학'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세금은 가슴이 아니라 차가운 머리로 다스려야 한다"고 훈수하고 "종부세 정책을 분배 정의라는 입장에서 밀어붙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한다. 다케우치는 "질투는 때로 정의라는 가면을 쓰고 나타난다"고 했다. 종부세 또한 서울 강남 부자들에 대한 질투를 정의로 포장한 것일 뿐이라는 얘기다. 부자들을 압박하여 대중을 후련하게 하는 방식의 '질투 경제학'은 결국 부자들과 부자들의 돈을 국외로 빠져나가게 하여 국내에 남은 빈자들의 세금 부담을 더 높이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강만수씨나 다케우치가 비판적으로 언급했던 '질투의 경제학'을 진짜 경제학으로 세우려고 작심한 사람이 '21세기 자본'을 쓴 토마 피케티일 것이다. 그는 성장과 불평등 사이의 관계를 낙관적으로 조망한 쿠즈네츠 이론에 의문을 표시한다. 지난 3세기 동안의 20개국 이상의 데이터를 바탕으로 자본소득이 노동소득보다 우위에 있음을 밝히고, 이것을 경제 불평등 심화의 근거로 삼았다. 이것을 근원적이고도 효과적으로 해소하기 위해선 글로벌 자본세를 거둬야 한다는 파격적인 주장을 낸다. 부자의 경제적 집중이 심화되고 있으니 세금으로 그것을 조정해야 빈자의 고통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는 얘기다.
그런데 대중적인 관심을 폭발시켰던 피케티 신드롬의 와중에서, 오히려 쿠즈네츠의 생각을 발전시킨 듯한 디턴이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디턴은 자본소득의 독식이 심화된 것은 사실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소득 전반이 증대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잠정적인 부작용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그보다 더 눈여겨봐야 할 것은, 전체적인 소득의 성장과 빈곤의 전반적인 개선이라고 한다. 그리고 수명이 연장되었고 노후에 대한 관심과 배려 또한 높아지고 있는 현상도 주목해야 한다고 말한다. 디턴은 중국을 보라고 한다. 중국인들이 과거보다 삶의 조건들이 좋아졌는지 나빠졌는지를 들여다보면, 성장이 가난한 계층을 소외만 시키는 것이라고는 볼 수 없음을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피케티의 생각은 '질투의 경제학'이 아니라 '경제학의 질투'일지 모른다. 경제학이 부자를 질투함으로써 불평등을 비경제적으로 해결하려는 감정적 잣대를 들이미는 형국이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가난한 사람들이 지니고 있는, 부자를 선망하는 '질투'의 긍정적 동력을 재발견한 디턴이야 말로 '질투'를 경제의 에너지원으로 읽어낸, 진정한 의미의 '질투의 경제학'일 수 있다.
2001년 4월26일자 이코노미스트지가 논쟁을 붙인 '배고픔의 경제학'과 '배아픔의 경제학' 또한 이 문제에 대한 오래된 고민을 드러낸다. 전 세계적 불평등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다면 공동체 위기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는 로버트 웨이드 런던대 경제학 교수의 경고에 대해 이코노미스트지는 부자를 끌어내리기 보다는 가난한 사람들을 끌어올리는 일이 훨씬 바람직하다고 논박했다. 배고픔도 배부른 사람을 선망하는 '질투'를 부를 수 있고, 배아픔도 배부른 사람에 대해 불쾌해지는 '질투'이니, 어떤 질투에 힘을 실을 것인가가 인류가 내내 고민해가야 할 질긴 화두임에 틀림없다.
이상국 기자 isomi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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