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공계 두뇌 썩히는 단기실적주의 연구경영…이게 창조경제입니까
"TV 장기연구하고 싶다고? 그럴 시간 어딨어"
[아시아경제 김은별 기자] "공부를 계속 해 교수가 되진 않았지만, 우리나라를 이끄는 기업에서 미래 기술을 개발한다는 자부심이 있었어요. 그런데 요즘엔 기업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가 된 것 같아 의욕이 나질 않습니다. 다시 학교로 돌아가야 하나 하는 생각도 들어요."
서울 소재 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이모(34)씨는 A기업에서 연구직으로 일하고 있다. 석ㆍ박사 과정을 시작할 때만 해도 교수가 되겠다는 꿈을 가졌던 그였다. 이씨의 동기들도 대부분 어떻게든 교수가 되겠다는 꿈을 가지고 시작했다. 그러나 지금은 대부분 '연구원들을 키워주겠다'는 대기업을 선택해 일하고 있다. 최근에는 대기업들 마저도 불황과 빠른 경쟁 시대 때문에 기초연구에 투자하긴 어려운 상황이라 국내 연구원들이 갈 곳 없는 신세로 전락하고 있다. 이씨는 "이도저도 아닌 신세가 된 것 같아 의욕이 나질 않는다"고 한숨을 쉬었다.
국내 이공계 석ㆍ박사 출신들이 갈수록 위축되고 있다. '교수가 되겠다'는 꿈을 이룬 비중도 현저히 줄어드는데다, 국책연구소 정규직 자리도 점차 줄어드는 추세다. 대기업들도 과거에는 기초연구를 담당하는 연구소들을 크게 확장시켰지만, 최근에는 기초연구 대신 현업에 바로 투입할 수 있는 단기 연구에 집중하는 모양새다. 기업에서라도 기초연구를 해 보겠다고 찾아온 연구직들은 갑자기 현업에 투입돼 납품기한을 맞춰야 하는 신세가 됐다.
삼성전자의 경우 최근 몇 년간 연구원들을 사업부로 배치하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연구개발(R&D)의 상징이던 종합기술원(이하 종기원)을 3년 전부터 축소, 대부분의 연구인력들이 사업부로 배치됐다.
예를 들어 종기원에서 광학 연구를 하던 연구원들은 어느날 의료기기사업부로 배치된다는 통보를 받았다. '렌즈'라는 공통점은 있지만, 어떤 렌즈가 좀 더 효율적인지 렌즈 소재에는 어떤 종류를 사용하는 것이 좋은지 등 먼 미래를 보고 연구하던 연구원들은 하루 아침에 의료기기 내 광학렌즈를 효율적으로 생산하는 방식을 고민해야만 했다.
연구원들의 소속 사업부를 1~2년 내에 급변시키는 경우도 많아졌다. 전공이나 경력과는 크게 관련이 없어도 '개발자가 필요하다'고 특정 사업부에서 요청하면 바로 파견시키는 형식이다. TV 개발을 담당하던 연구원이 어느날 휴대폰 사업부로 배치되는 식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대기업에서 연구하던 연구원들 사이에서는 '무슨 일을 해도 좋으니 사업부만 가지 않으면 좋겠다'는 말이 나오기도 한다. 최근 LG전자 연구원으로 입사한 박 모 씨는 "입사를 선택할 때 가장 중요했던 점이 사업부로 배치되는지 여부였다"며 "연봉이 좀 낮더라도 사업부에서 납품기한을 맞춰 단기개발을 하는 것만은 피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연구원들의 고충을 이해하지만, 기업들도 어쩔 수 없다는 답변이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기초연구를 육성해야 한다는 점에는 동의하지만, 기업이 봉사 기관이 아닌 이상 회사 사정에 따라 연구원들을 활용할 수밖에 없다"고 답했다.
연구기관, 대학, 대기업 등으로 한정된 진로 선택에서 벗어나 소규모 창업 등에 연구원들이 눈을 돌려야 한다는 조언도 있다. 최근 정부와 기업이 스타트업이나 벤처기업을 지원해 투자하고 키워내는 데 주력하고 있는 만큼, 연구원들도 어딘가에 소속되기보다는 좀 더 도전적으로 나서야 한다는 얘기다.
국내 사립대학 박사과정 재직자는 "정부나 기업의 지원이 확실히 보장된다고만 한다면 이공계 인재들이 좀 더 진취적으로 나설 수 있을 것"이라며 "한시적으로 특정 업체에 보여주기 식으로 지원하는 대신, 좀 더 장기적인 석박사급 인재 지원방안이 마련돼야 한다"고 전했다.
김은별 기자 silverstar@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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