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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시선]불면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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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시선]불면의 시간 김환학 서울대 행정연구소 특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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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덩이 효과(snowball effect)라는 용어가 있다. 작은 눈뭉치를 굴리면 점점 커지면서 늘어난 무게로 땅을 눌러 눈이 점점 더 뭉쳐지는 현상에 빗대었다. 재테크에는 경지에 올랐다는 워런 버핏이 적은 원금에 이자가 붙고 이자에 이자가 붙어 나중에는 눈덩이처럼 큰 자산으로 불어난다고 설명하면서 이 말을 썼다고 한다. 빌려준 쪽이 이렇게 좋은데, 그 뒷면에 빚진 쪽은 어떨까. 재정학 문제이다. 빚은 천장 위의 쥐새끼처럼 잠도 자지 않고 새끼를 치고 가속이 붙어 불어난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원금이었던 작은 눈뭉치는 섞이고 가려져 원래 빚이 무엇이고 왜 시작되었는지는 보이지 않게 된다.


이는 빚으로 유명해진 남유럽의 상황에서 잘 드러난다. 먼저 시칠리아의 한 마을의 상황이다. 이 마을의 좋은 관광자원인 수도원이 하필이면, 혹은 당연히 벼랑 위에 서 있어 관광객이 좀 더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승강기를 설치했다. 흔히 그렇듯이 관광산업진흥과 지역경제 활성화를 위해서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준공식을 하면서 딱 한 번 운행을 하고는 멈춰 버렸다. 이 승강기의 설치에 유럽연합(EU)의 지역균형개발기금이 200만유로가 투입됐는데 그 운행과 관리, 보험 등에 소요되는 연간 10만유로를 인구 1400명의 작은 마을로서는 감당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다. 그 마을도 적지 않은 지출을 하였는데, 이 눈에 빤히 보이는 결말을 왜 막지 못했는가 하는 의문은 투입된 기금 대부분이 지역 마피아의 수중으로 들어갔다는 데에서 쉽게 풀린다.

포르투갈은 좀 더 심각하다. 이 서유럽 최빈국은 이러한 유럽연합기금에서 20여년간 도합 960억유로를 지원받아 도로건설에 쏟아부었고, 인구 당 영국의 4배에 이르는 도로망을 보유하게 됐다. 그러나 자동차 대수도 얼마되지 않는 데다 통행료도 비싸 도로는 텅 비었고 관리비용은 온전히 국가의 부담으로 돌아가 가뜩이나 빈약한 국가재정을 옥죄고 있다고 한다. 이러한 일들이 곳곳에서, 분야에 따라 다양하게 벌어지고 중첩되면 빚을 내어 빚을 막게 되고 국가재정은 불가역적으로 악화된다. 이는 포르투갈과 이탈리아, 그리스, 스페인을 싸잡아 PIGS라 부르는 모욕에 그치지 않는다. 그리스에 급진좌파 정권이 들어서고 국민투표를 해본들, 독일 재무장관 쇼이블레가 바덴사투리와 영어를 섞어 언명한 최후통첩 "isch over(it's over)"로 그만이다. 잔치는 끝났다. 곶감 꼬치에서 곶감 빼먹듯 벌린 손마다에 나눠주고 손님도 모두들 돌아갔으니 이제 빚 갚을 일만 남았다. 아니면 살을 깎든지…


드디어 내년에는 우리나라의 국가채무가 국내총생산(GDP)의 40%대에 이른단다. 이 정도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보다 낮다고 눙치려 하지만 우리나라는 GDP에서 국가재정이 차지하는 비중이 다른 OECD 국가들보다 훨씬 낮기 때문에 단순비교할 일이 아니다. 더 걱정은 가계부채다. IMF사태 이후 이 나라를 지배한 신자유주의는 기실 기업의 부채가 가계로 이전되는 과정이었다. 금모으기 운동이 자발적이었고 보면 그 평가를 그리 단순하게 할 수는 없지만 정권을 이어 지금까지 소비를 늘리려 신용카드를 남발했고, 누구 말대로 부동산은 '10배 남는 장사'로 거품을 키워왔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가 부채질하는 베블런효과(과시 소비)는 덤이다. 덕분에 가계부채가 지난 3월 말 기준 1100조원에 육박했다. 그중 절반 이상이 주택담보대출이다. 과연 아파트를 계속 머리위에 이고 살 수 있을지, 이자율이 언제까지 고개 숙이고 떠받쳐줄지, 다들 민감하게 미국의 기준금리만 바라보고 있는데 정작 정책 당국이 빚내서 집 사라고 한 적 없다고 하는 것을 보면 'isch over'가 그리 멀지 않은 듯하다.


영화 '올드보이'에서 최민식의 독백으로 유명해진 윌콕스의 시구, "웃어라. 온 세상이 너와 함께 웃을 것이다. 울어라. 너 혼자만 울게 될 것이다"는 이렇게 계속된다. "네가 건네는 달콤한 와인이야 그 누구도 마다하지 않지만, 삶의 신산은 너 혼자 들이켜야 한다… 좋을 때에야 장황한 인생살이 품어줄 여유가 있지만 고통의 협로는 너나할 것 없이 한 사람 한 사람 지나가야 한다." 열대야는 끝났지만 가을바람을 핑계로 불면의 밤은 계속될 것이다.


김환학 서울대 행정연구소 특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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