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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그 시절…제 꿈은 '국민 배불리기'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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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70주년 해방둥이 기업들, 식품·유통 많은 까닭

SPC, '상미당' 빵집 시작…해태제과, 민족자본 제과점 설립


그때 그 시절…제 꿈은 '국민 배불리기'였죠 해방둥이 기업인 '상미당(현 삼립식품·위쪽)과 '해태제과'의 초창기 건물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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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이광호 기자]1945년 일제강점에서 갓 벗어난 당시는 모든 산업이 일시 정지돼 아수라장 그 자체였다. 특히 보릿고개를 겪으며 배고픔에 굶주리던 국민들에게는 먹고사는 문제가 가장 큰 숙제였다. 시대상을 반영하듯 당시의 기업은 식품, 생필품, 제약 등을 제조하는 회사들이 주를 이뤘다. 올해 유독 유통가에 창립 70주년을 맞은 해방둥이 기업들이 많은 것도 이 때문이다. 한국 현대사가 수많은 굴곡의 역사를 써 온 것처럼 이들 기업도 격변의 시간을 겪으며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7일 관련업계에 따르면 해방둥이 기업 중 현재까지 건재하는 기업은 삼립식품(SPC그룹), 해태제과, 아모레퍼시픽, 중외제약 등이다. 한진그룹도 올해 창립 70주년을 맞았다.


먹고 사는 문제가 절박했던 1945년 해방 직후 파리바게뜨로 유명한 SPC그룹은 황해도 옹진군에 상미당(현 삼립식품)이라는 작은 빵집을 열었다. 창업주인 허창성 명예회장은 당시 상류층에서 빵을 즐긴다는 점에 주목해 제과업에 뛰어든 것으로 알려졌다. 허 명예회장은 3년 후 서울 을지로로 자리를 옮겨 본격적으로 사업 확장에 나섰다.

경쟁 업체들과 치열한 경쟁을 거친 끝에 1959년 삼립제과공사를 설립, 빵과 비스켓 등을 본격적으로 생산하기 시작했다. 국민 간식으로 불렸던 호빵, 크림빵을 잇달아 내놓으며 성장 가도를 달렸고, 현재는 빵의 본고장 프랑스에까지 진출했다. SPC그룹은 2020년까지 삼립식품 매출 4조원을 포함해 그룹 매출 10조원을 달성한다는 청사진을 그리고 있다.


광복 이후 순수한 민족자본과 우리 기술로 출범한 국내 최고의 식품회사가 바로 해태제과다. 해태제과는 1945년 해태제과 합명회사로 출발했다. 창업주인 박병규 회장은 너도나도 배고팠던 시절, 굶주린 국민들의 배를 채워 줄 제과를 만들겠다는 신념으로 일제 강점기 시절 제과회사에서 근무한 경험을 살려 회사를 설립했다. 1960년 해태제과공업주식회사로 사명을 변경, 서울 영등포 양평동에 국내 최대 규모의 생산공장을 조성하면서 발전을 거듭했다.


국내 최초 아이스크림콘인 부라보콘을 출시해 빅히트를 쳤고 맛동산, 에이스, 누가바, 바밤바 등 히트제품을 쏟아냈다. 1981년 프로야구 출범과 함께 탄생한 홈런볼, 오예스 등도 대표적인 장수 브랜드다. 해태제과는 시련도 겪었다. 한때 재계 24위에 오르며 해태제과를 포함한 해태음료, 해태중공업 등 계열사 7개를 거느렸지만 사업확장이 발목을 잡아으며 IMF 환란 때인 1997년 11월 부도를 맞았다. 법정관리에 들어간 지 8년만인 2005년 10월 크라운제과에 인수되며 윤영달 회장의 노력으로 제과기업의 위상을 회복 중이다. 특히 지난해 8월 선보인 허니버터칩이 대박을 터트리며 과거의 명성을 되찾는데 큰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방문판매 시스템으로 유통혁신을 일으켰던 아모레퍼시픽그룹도 해방둥이 기업이다.
아모레퍼시픽그룹은 창업주인 고(故) 서성환 선대 회장이 모친(고 윤독정 여사)이 만들어 판매했던 동백기름, 미안수(스킨), 구리무(크림)을 기반으로 해방 직후 메로디크림을 출시, 판매돌풍을 일으키며 오늘날의 초석을 닦았다.


당시에는 물자가 부족해 모든 제조업종에서 원료를 구하기 어려웠고, 더구나 동백나무는 남부지방 해안가에서 자라 개성에서는 열매를 공급받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윤 여사는 '좋은 원료에서 최고 품질이 나온다'는 것을 철칙으로 고품질의 동백나무 열매를 얻기 위해 수백 리 해안지역도 가리지 않고 백방으로 뛰어다녔다고 한다.


어머니의 일을 돕던 서 창업주 역시 신용과 성실을 중시하는 '개성상인 DNA'를 자연스럽게 체득했다. 1943년 일제에 징용을 당해 중국으로 건너갔던 서 창업주는 전쟁이 끝난 뒤에도 개성으로 돌아오지 않고 중국을 여행하면서 아시아의 여러 문물이 뒤섞이며 교류하는 현장을 경험한다. 아시아의 미(美)를 태평양 너머 서구에까지 전파하는 일도 가능할 것이란 꿈을 갖게 된 서 창업주는 한국으로 돌아와 태평양화학공업사라는 간판을 달고 지금의 아모레퍼시픽그룹을 이뤘다. 현재는 글로벌 럭셔리 뷰티 브랜드도 기술을 답습할 만큼 세계적 기업이 됐다. 특히 지난해에는 중국을 발판으로 사상 첫 화장품 무역수지 흑자를 이끌어 내기도 했다.


이 외에도 1945년에 세워진 회사 중에는 제약 업종 기업이 많다. 국내 최초로 포도당 수액을 생산한 조선중외제약소(현 JW중외제약), 창립 후부터 대표 상품인 우루사 개발에 힘써 온 대한간유제약공업(현 대웅제약)과 조선약품화학공사(현 대한약품), 보건제약소(현 삼아제약) 등이 있다.


오늘날 대기업으로 성장한 한진그룹도 해방둥이 기업으로 꼽힌다. 한진그룹은 1945년 11월 '한민족의 전진'이라는 의미를 담은 한진상사 창업이 모태다. 70년 동안 수송 외길을 걸어온 한진그룹은 대한항공, 한진해운, 한진을 주축으로 육해공을 아우르는 종합 물류 기업으로 성장했다. 한진그룹의 성장은 베트남전 당시 미군 군수물자 수숭을 맡으면서다.


1967년 7월에는 자본금 2억원으로 해운업 진출을 위해 대진해운을 세우고, 같은 해 9월 동양화재해상보험주식회사를 인수했다. 1968년 2월에는 한국공항, 8월에는 한일개발을 설립하고, 9월에는 인하공대를 인수했다. 이듬해인 1969년에는 대한항공공사를 인수하면서 명실상부한 기업이 됐다. 그 결과 재계 순위 10위 한진은 '수송을 통해 국가, 사회, 인류의 발전에 기여한다'는 창업주의 수송보국 창업정신에 입각해 창의와 신념, 성의와 실천, 책임과 봉사를 그룹 사훈으로 삼아 지속적인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해방과 함께 탄생해 온갖 어려움 속에 살아남은 기업들은 이제 100년 기업을 꿈꾸며 제 2의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며 "산업 트렌드가 빨리 변한다고 하지만 현장에서 수십년간 쌓은 노하우는 돈으로 살 수 없는 가치"라고 말했다.




이광호 기자 kwang@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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