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가는 곳/어디나 백일(白日)이 없을소냐./머언 미개(未開)적 유풍(遺風)을 그대로/성신(星辰)과 더불어 잠자고/비와 바람을 더불어 근심하고/나의 생명과/생명에 속한 것을 열애(熱愛)하되/삼가 애련(愛憐)에 빠지지 않음은/그는 치욕(恥辱)임일레라.//나의 원수와/원수에게 아첨하는 자에겐/가장 옳은 증오(憎惡)를 예비하였나니./마지막 우러른 태양이/두 동공(瞳孔)에 해바라기처럼 박힌 채로/내 어느 불의(不意)에 짐승처럼 무찔리기로/오오, 나의 세상의 거룩한 일월(日月)에/또한 무슨 회한(悔恨)인들 남길소냐.
-청마 유치환의 '일월(日月)'
1908년생인 청마가 1939년에 이 시를 발표했으니, 그의 나이 서른한 살 때이다. 태어난지 2년 만에 나라를 잃었고, 29년 동안 자신의 나라를 경험해보지 못한 식민지 청년이었다. 청마는 왜 시의 앞머리에 나오듯 백일(白日)만을 가져오지 않고 해와 달을 함께 끌어와 시의 제목을 썼을까. 나라가 없는 인간이 마주한 절대고독은 어딘가에 기댈 배경이 필요했을 것이다. 언제나 떠오르는 해가 가장 믿을 만한 '보험'이었을 테지만, 그에겐 밤에도 멈추지 않는 지원자가 필요했다. 그래서 달까지 보험 들어 시간적인 영속성을 꿈꾸었을 것이다.
'나의 가는 곳 어디나 백일이 없을소냐.' 이 단언에는 저 밝은 해가 아니면, 아무도 '나'를 지지해줄 수 없고 알아줄 수도 없으며 나의 가치를 보장해줄 수도 없는 '현실'이 있다. 아무리 태양광 '백'을 외치고 다녀도, 외로운 건 마찬가지지만 나의 근원적 자존감을 유지하는 방법으로는 이것밖에 선택할 게 없다. 오래전 원시인들이 해와 달을 숭배하고 별빛을 우러르며 살고 비와 바람을 두려워하며 살았듯이, 나 또한 '자연'에 복종하는 인간으로 살겠다고 다짐한다. 이 젊은 청년은 왜 이런 말을 하고 있을까. 자연과 나 사이에 존재하는 '사회적 시스템' 혹은 국가권력에 대한 안정감과 신뢰를 잃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생명을 사랑하겠다고 한다. 생명은 무엇인가. '나'처럼 나라가 없고 재산도 없고 권력도 없어서 헐벗고 살아가면서도 그 삶을 포기하지 않는, 이 땅의 사람들이다. 그는 유언장을 쓴다. 식민지의 슬픈 생명에 대해 열애하고 일제와 일제 아첨자를 증오하다가 어느 대낮에 눈동자 속에 해바라기 같은 태양이 들어앉는 종말을 맞이한다 해도 난 국가 없는 원시인으로서 해와 달에 한 점 후회와 부끄러움도 없을 것이다.
일제에 아부하며 사느니 차라리 해와 달을 우러르던 원시인이 되어 죽음도 겁내지 않고 정당한 증오를 깊이 품으며 살아가겠다는 저 일월신앙이 무슨 생명파 따위의 희한한 파벌이란 말인가. 가슴 속에 해와 달이 벌겋게 떠올라 나라 없이도 큰 인간으로 살아가겠다는 청마를 다시 읽으며 이마를 친다.
빈섬 이상국 (편집부장·시인) isomi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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