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농 아들서 월가 거물이 되기까지
[아시아경제 조유진 기자] 1891년 5달러를 쥐고 집을 뛰쳐나온 소년 제시 리버모어가 첫 주식투자로 올린 수익은 62%. 그의 나이 15살 때다. 미국 매사추세츠 빈농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가난 때문에 초등학교를 중퇴했다. 앞날이 보이지 않는 삶에서 탈출하기 위해 14살 때 단돈 5달러를 쥐고 집을 나왔다. 그리고 보스턴에 있는 페인웨버라는 증권회사의 '호가판주사'로 일을 시작했다.
당시 증권회사의 객장에는 증권시세표시기를 통해 들어오는 주가를 고객들이 볼 수 있도록 기록하는 커다란 칠판이 있었는데, 그는 주가를 그 칠판에 기록하는 일을 담당했다. 장중 거래가 활발하게 이뤄지는 주식의 주가를 기록하며 숫자의 움직임을 연구하고 패턴을 찾아내려 했다. 컴퓨터 트레이딩시스템이나 할 수 있는 주가 패턴 정의나 수익률 통계를 10대 어린 꼬마의 손으로 시도한 것이다.
제시 리버모어는 15살에 첫 거래로 3.12달러의 수익을 올린 것이 투자인생의 출발이었다. 그해 주식과 상품거래로 1000달러 수익을 올렸다. '몰빵꼬마'라는 별명으로 요주의 대상이 됐고, 거래소 출입을 금지당하기까지 했다. 이를 계기로 전업투자자로 변신했고 20살 무렵까지 1만달러의 수익을 올렸다.
21살 때 보스턴에서 뉴욕 증권거래소(NSE)로 주 무대를 옮긴 뒤 1년 만에 전 재산을 잃게 됐다. 증권회사로 들어가 단 이틀 만에 2800달러를 벌어들이며 재기의 발판을 다지지만 얼마 지나지지 않아 공매도 실패가 이어지며 다시 빈털터리가 된다. 당시 고공행진하던 노던퍼시픽철도(NPR) 주식의 반락을 예견해 5만달러 어치 주식 전량을 공매도 친 것이 화근이었다. 이 공매도 주문과 청산체결 시간이 연속적으로 지연되면서 그는 5만달러를 모두 잃었다.
1907년 30살 때 기회가 찾아왔다. 샌프란시스코 대지진으로 인한 혼란과 영란은행의 금리 인상이 맞물리며 대폭락장이 왔을 때다. 그는 공매도로 단 며칠 만에 300만달러를 벌었다. 당시 리버모어의 공매도 파장은 시장의 방향을 좌지우지할 정도로 막강했다. JP모건이 공매도를 멈춰달라고 요청했다는 일화가 전해지면서 '월가의 큰곰'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이후 1929년 대공황 당시에도 시장 급락을 예견해 1억달러라는 천문학적 수익을 올렸다.
그는 과도한 레버리지 투자와 사치스러운 생활로 3번의 파산을 겪고, 1934년 3월7일 마지막 4번째 파산으로 비극을 맞게 된다. 1억달러에 달했던 자산은 18만달러로 쪼그라들었고, 부채는 226만달러로 늘었다. 3번의 결혼생활 실패와 과도한 음주, 말년에 우울증까지 겹치면서 1940년 11월28일 뉴욕의 한 호텔에서 권총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조유진 기자 tint@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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