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오진희 기자] 국립중앙박물관이 상설전시실인 조선실의 유물들을 대폭 탈바꿈했다. 최고(最古) 향촌계회 조직과 관련된 자료, 정조가 직접 채점한 답안지가 나왔고, 구입이나 발굴로 처음 공개되는 유물도 다수 포함돼 있다.
4일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 조선실 안에 새 유물들이 공개됐다. 교체된 유물들은 고려 후기에 작성된 국보 131호 이태조 호적 원본, 정조가 왕세손으로 책봉되는 과정을 기록한 의궤, 정선의 세검정 그림, 사대부가 여성들이 사용했던 소품, 이탈리아 주간지에 실린 고종의 장례식 기사 등 50건 92점 규모다.
이 중 유성룡의 임진왜란 기록인 '징비록(懲毖錄)' 필사본, 1731년에 정혁선(1666~1733년)이 작성한 재산분배 기록, 헌종의 계비 효정왕후(孝定王后)의 한글 편지 등 20여점이 이번 교체전을 통해 처음 공개되는 유물들이다.
그 외에 550년 전에 결성된 국내 최고의 향촌 계회 조직인 금란반월회(金蘭半月會)와 관련한 고문서 자료인 '금란반월회문'도 주목할만하다. 이 자료에는 계획의 내력과 회의 규칙, 회원의 이름이 기록돼 있다. 금란반월회는 강릉 지역의 향촌사회를 유학적 이념으로 개혁하기 위해 1466년(세조 12) 음력 9월 9일에 강릉 지방의 유학자 16명이 결성한 단체로, 향촌 사회에 유학을 보급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오늘날까지 그 명맥을 유지해 오고 있다. 앞서 금란반월회문은 1982년 고려대학교 도서관이 개최한 전시에서 국내 최고의 계회 자료로 최초 공개됐으며, 1983년에는 계회의 후손이 소장한 계회도가 소개됐다. 2008년에는 계회문 상단에 계회도가 그려진 원래의 형식을 유지한 자료가 전시돼 세간에 화제가 됐다. 이번 전시 자료는 이들 자료들과 다른 것으로, 비교 고증을 통한 제작 연대 파악이 필요하다.
'갑을동계지도'(甲乙同契之圖, 갑인년과 을묘년생 동갑들의 모임을 그린 그림)는 1614년(갑인년)과 1615년(을묘년)에 태어난 강릉 지역 문인 16명이 경포대에서 모임을 갖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경포대를 배경으로 한 계회의 모습은 엷은 먹으로 그려져 있다. 그림 좌측에는 경포대에서 동갑, 동향인 구성원들이 즐겼다는 내용을 썼다. 아래쪽에는 회원 16명의 이름과 자, 본관, 거주 촌락 이름이 기록돼 있다. 그림이 뛰어난건 아니지만, 향촌의 동갑내기 문인들이 만든 계회도로는 희귀한 것이다. 박물관 관계자는 "조선 중기의 계회도가 얼마 남아 있지 않은 가운데 17세기라는 비교적 이른 시기에 제작되었다는 점에서도 가치가 크다"고 했다. 갑을동계의 구성원 중 최응천(1615~1671년)의 5대조가 금란반월회를 결성한 최자점이다. 또 계회의 구성원들 가운데 반 이상이 금란반월회 구성원이었던 강릉 최씨, 강릉 김씨, 강릉 박씨의 후손들이다. 이 같은 연관성으로 볼 때 이 동갑 모임은 금란반월회와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외에도 유득공, 박제가, 이덕무와 함께 한시 4대가로 꼽히는 이서구(1754∼1825년)가 정조의 명으로 작성하고 정조가 직접 채점을 한 시험 답안지가 있다. 이 답안지는 이서구가 규장각의 초계문신(抄?文臣) 시절인 1785년(정조 9) 10월 24일 작성한 것으로 ‘작매예(嚼梅蘂, 매화 꽃잎을 씹다)’라는 제목의 시이다. 붉은 색 먹으로 차중(次中, 넷째 등급의 둘째 급)이라고 쓴 채점이 있으며, 시구 여러 곳에 붉은 색 줄을 긋고 어말(御抹, 국왕이 칠하다)이라는 종이를 붙여, 정조가 직접 채점했음을 알 수 있다.
오진희 기자 valere@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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