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신범수 기자] 박근혜 대통령이 의회와의 전면전을 선포했다. 야당은 당장 의사일정 전면 보이콧에 나설 태세고 지도부 책임론으로 인한 여당 내 분란도 불가피해졌다. 박 대통령의 25일 국회법 개정안 거부권 행사는 국정마비를 막기 위한 선택이었다지만, 오히려 국회 파행으로 인한 국정추진 동력의 심각한 훼손이 불 보듯 뻔해졌다.
정부는 이날 오전 국무회의에서 국회법 개정안 재의요구안(거부권 행사)을 상정해 통과시켰다. 앞으로 대통령의 재가를 거쳐 법제처가 재의요구안을 국회에 제출하는 일만 남았다. 국회는 되돌아온 법률안을 재의결하거나 폐기할 수 있다. 국회법 개정안은 법률의 취지에 맞지 않는 정부 시행령에 대해 국회가 수정ㆍ변경을 요청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정부에 대한 국회의 견제 기능을 강화한 것이다.
현재로선 가능성이 낮지만 국회가 본회의를 열어 재의결하면 국회법 개정안은 원안대로 확정된다. 그러나 국회의장이 본회의에 이 안건을 상정하지 않거나, 하더라도 정족수 미달 혹은 부결될 경우 법안은 폐기된다. 어떤 경우라도 박 대통령 혹은 여야 지도부에 상당한 정치적 타격을 의미한다.
박 대통령이 이 같은 혼란을 감수하면서까지 거부권 행사를 밀어붙인 것은 크게 두 가지 이유 때문인 것으로 분석된다. 이 법이 시행되면 앞으로 정부가 시행령 개정으로 추진하려는 정책에 대해 국회 특히 야당의 발목잡기가 심해질 것이란 우려를 박 대통령은 공개적으로 피력한 바 있다. 시행령 제ㆍ개정은 법률 개정과 달리 국회 통과가 필요 없어 국정운영의 편리한 '도구'로 활용돼 왔다.
그러나 새 국회법이 시행되더라도 국회가 정부의 시행령 제ㆍ개정에 제동을 걸기 위해선 여야 합의가 필요하다. 박 대통령이 내세우는 "사사건건 시비를 걸어 국정이 마비될 것"이란 걱정은 지나친 측면이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정부와 국회가 시행령의 법률 취지 위배 여부를 놓고 의견을 달리 할 때 헌법재판소를 통해 해결할 수 있는 방법도 여전히 유효하다.
이런 맥락에서 박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는 집권 후반기 핵심과제를 본격 추진하려는 상황에서, 국회와의 관계를 확실하게 정립하겠다는 의도로 볼 수 있다. 정부의 손발을 묶는 법률을 앉아서 수용한다는 것은 국회 권력이 청와대를 압도했다는 현실을 인정하는 것일 수 있다. 레임덕의 시작을 자인하는 꼴이다.
국회로 돌아간 국회법 개정안을 새누리당이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는 박 대통령과 새누리당 힘겨루기의 승자가 누구인지를 알려주는 바로미터다. 새누리당은 의원총회를 열어 의견을 정리할 것으로 예상되는데, 대통령과의 정면충돌을 피해야 한다는 의견이 우세할 경우 재의결에 불참해 정족수 미달로 법안을 폐기시킬 것으로 전망된다. 김무성 대표 등 지도부가 야당과의 협력관계를 포기하고 원활한 당청관계를 택하는 길이다.
이는 박 대통령의 정치적 승리도 의미하며 대통령과 엇박자를 내온 유승민 원내대표의 사퇴론이 거세지는 등 내홍이 격화될 것으로 보인다. 유 대표의 사퇴는 친박계의 지도부 재장악 공간을 마련해준다. 반면 새누리당의 표결 참여와 재의결은 당청관계에서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는 것과 같다. 박 대통령의 탈당도 점쳐진다.
신범수 기자 answer@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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