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박철응 기자]1995년 6월29일 오후, 서울 강남의 삼풍백화점에서는 10여명의 경영진들이 모인 대책회의가 열렸다. 5층 식당가에서 천장이 일부 내려앉고 바닥이 갈라지는 등 이상징후가 발견됐기 때문이다. 경영진들도 직접 현장을 확인했다. 기둥 균열과 누수 등 붕괴의 조짐은 곳곳에서 감지됐다.
하지만 경영진의 결정은 철저한 보안 유지와 '정상영업'이었다. 고객들에게 안내하고 대피시켰을 때 야기될 손실은 명백하지만 건물 붕괴 가능성은 낮다는 판단에서 내린 조치였다. '설마' 했던 것이다. 경영진들은 붕괴가 시작되자마자 모두 건물에서 잽싸게 빠져나왔다.
지난해 한국 국민들은 TV를 통해 수학여행 떠난 고등학생들이 타고 있다는 세월호가 서서히 물 속에 잠기는 모습을 지켜봤다. 초기엔 물 위로 드러난 배가 번연히 보이니까 '전원 구조'라는 오보에도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하지만 결과는 억장이 무너져내리는 대참사였다.
모두가 지켜봤다. 백화점이 일순간에 무너지는 황망한 참변에 이어 이번엔 국가 시스템에 대한 믿음이 일거에 무너져내렸다. 정부에 대한 불신과 함께 각자 판단과 행동이 생존의 조건 중 하나라는 생각이 가슴에 아로새겨졌다.
그리고 1년여 뒤에 메르스가 들이닥쳤다. 박근혜 대통령은 동대문 의류상가 등을 찾아다니며 "너무 위축될 필요 없이 정상적인 생활을 해달라"고 당부하고 있다. 외국인 관광객에게는 "안심해도 된다"고도 했다. 이 또한 '비정상의 정상화'로 보는 것 같다.
물론 경제 상황을 보면 대통령의 절박함은 이해가 된다. 수출 감소에 더해 내수가 급격히 얼어붙고 있으며 사상 최악의 가뭄으로 국토가 타들어가고 있다. 관광객들은 한국으로 향하려던 발길을 돌린다.
급기야는 17일 한국금융연구원이 올해 경제성장률 전망을 기존 3.7%에서 2.8%로 대폭 하향 조정했다. 국내 주요 연구기관 중에서는 처음으로 2%대 성장률 전망을 내놓은 것이다. 가계 부채, 노후 대비 등 구조적 요인에 더해 메르스가 겹쳐져 민간 소비가 2.0% 증가에 그칠 것이란 어두운 진단을 내렸다. 물론 메르스가 지역감염 등으로 확대되지 않는다는 전제에서 분석한 것이다. 메르스 사태가 장기화되고 심화될 경우 한국 경제는 걷잡을 수 없는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다.
하지만 국민들의 불안은 오랜 학습효과에 더해 정부의 메르스 부실 대응에 기인하고 있다. 병원명을 뒤늦게 공개한 것은 치명적인 잘못이라는 평가가 주를 이룬다. 감염 경로를 파악할 수 없는 환자들이 늘고, 기저질환이 없는 건강한 사람에게는 독감처럼 지나간다는 정부의 호언에도 구멍이 뚫리고 있다.
불안의 원인을 이루는 주된 축이 그간 정부의 행태이기 때문에, 대통령의 말로 불식시킬 수 있다고 기대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국민의 눈과 귀로 체득한 불신이 불안을 증폭시켰다. 메르스는 생존의 문제다. 국민은 그 어느 때보다 상황을 예의주시하면서 각자 냉철한 판단을 내리고 있다.
대통령은 그 불안을 존중해야 하며 대통령이 원하는대로 불안을 불식시키려면 그에 맞는 실천을 보여줘야 한다. 불이 타고 있을 때는 "괜찮다"는 강변보다는 몸을 사리지 않고 진화에 나서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라는 얘기다.
박철응 기자 hero@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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