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류정민 차장] 대법원이 올해부터 9월13일을 '대한민국 법원의 날'로 지정했다. 초대 대법원장인 가인 김병로 선생이 취임한 날이다.
이승만 전 대통령은 1945년 8월5일 초대 대법원장으로 김병로 선생을 지명하고 국회 승인까지 받았다. 하지만 미국 군정에서 사법권 이양을 받지 못해 정식으로 취임하지 못했다.
그러다 한 달 후쯤 미 군정으로부터 공식적으로 사법권을 이양받았다. 대법원은 이날을 가리켜 "외세와 행정부로부터 독립된 사법부가 탄생한 날"이라고 설명했다. "사법부 독립에 대한 국가적인 자긍심을 일깨우고, 재판의 독립과 법치주의 의미를 되새기겠다"고도 했다.
사법부가 '대한민국 법원의 날'을 내부 구성원의 잔칫날이 아니라 국민에게 의미 있는 날로 만들 생각이라면 역사의 양지와 음지를 모두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사법부가 그토록 강조하는 재판의 독립이 현실에서 실천됐는지, 아쉬운 점은 없는지 살펴봐야 한다는 얘기다.
대법원은 5월29일 도예종씨 등 1차 '인민혁명당(인혁당)' 관련자 9명에 대한 재심에서 무죄를 최종적으로 확정했다. 대법원이 1965년 똑같은 사건에 대해 유죄를 선고한 뒤 50년 만에 무죄를 선고한 셈이다.
앞서 대법원은 2007~2008년 2차 인혁당 사건 재심에서도 무죄를 최종적으로 확정했다. 하지만 도예종씨는 기쁨을 나누지 못했다. 도씨 등 2차 인혁당 사건 관련자 8명은 40년 전인 1975년 4월9일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기 때문이다. 대법원이 4월8일 사형을 선고한 다음 날 사형집행이 이뤄졌다. 불과 18시간 만이다. 이날 사건은 사법 역사 최악의 치욕사건으로 불린다.
4월9일 '사법살인'의 부끄러운 장면은 세계적인 권위의 국제법학자협회로부터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지정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1970년대 당시 사법부는 엄혹한 세상에 구원의 빛이 되지 못했다. 권력이 인권을 유린하고 법을 짓밟는 것을 지켜봤고 오히려 동조했다.
인혁당 사건이 최종 무죄판결을 받자 대법원이 과거의 잘못된 판결을 사과할 것인지 관심이 쏠렸다. 대법원은 아무런 사과 없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넘어갔다. 대법원은 지난달 14일 강기훈씨 유서대필 재심사건 무죄 확정 판결 때도 사과 없이 지나갔다.
강씨는 1992년 7월 대법원에서 징역 3년의 유죄를 확정받아 형기를 다 채웠다. 뒤늦게 법원 재심을 통해 무죄를 받았지만, 그의 몸과 마음은 만신창이가 됐고 현재 '간암'에 걸려 생사를 걱정해야 하는 처지다. 강씨는 사과를 간절히 기다렸지만, 돌아온 것은 법원의 침묵이었다.
대법원은 조용히(?) 축제의 시간을 준비하고 있다. 대법원은 인혁당 사건 최종 무죄판결이 이뤄진 5월29일, 잔칫날에 대한 홍보자료를 언론에 전했다. '대한민국 법원의 날'을 지정하기로 했으니 관심을 바란다는 내용도 곁들였다.
사법부가 부끄러운 과거에 대한 반성 없이 '장밋빛 기념일'을 마련한다면 반쪽짜리 내부 잔치와 무엇이 다른가. 치욕스러운 역사가 담긴 '잿빛 기념일'도 사법부 역사의 일부분이다.
사법부가 국민 앞에서 헌법 유린에 편승했던 과거의 잘못을 반성하는 자리를 마련하는 것은 어떨까. 그런 행동이 사법부 권위를 훼손한다고 생각한다면 단견(短見)이다. 사법부 권위는 어디에서 생겨날까. 국민 마음에서 우러나오지 않는 권위는 허상(虛像)에 불과하다.
류정민 차장 jmryu@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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