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백우진 기자] “규슈를 다시 평정한 뒤 그 병사로 곧바로 조선을 정벌하고 나아가 명(明)의 400주를 석권하여 황국의 판도로 삼겠습니다.”
“이번에는 틀림없이 전 중국을 복종시킬 것이다. 세계를 나누어 가진 세 나라, 즉 일본ㆍ중국ㆍ인도 가운데 나에게 저항할 만한 자는 아무도 없다.”
“명을 치러 갈 테니 조선은 길을 빌려달라”(征明假道)고 요구하며 1952년 전쟁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편지에 쓴 구상과 자신감이다.
히데요시는 조선과 명을 정벌한다는 구상을 임진왜란을 일으키기 15년 전인 1577년에 내놓았다. 그는 일본 주고쿠(中國) 지방을 평정한 뒤 당시 주군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에게 한 보고에서 이를 제시했다.
둘째 편지는 왜군이 한양에 입성했다는 소식을 듣고 조카 도요토미 히데쓰구(豊臣秀次)에게 보낸 것이다. 그는 이 편지에서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일본 천황을 중국 수도인 베이징으로 옮기게 할 것이다. 그에게는 베이징 주변의 10개 영국(領國)을 줄 것이다.”
“너(히데쓰구)를 중국의 관백으로 임명하겠다.”
관백은 히데요시 자신이 맡고 있던 직책이었다.
히데요시는 이어 일본의 천황과 관백, 그리고 조선의 왕 후임 인사를 거론했다.
이 편지를 구술하는 동안 히데요시는 지나칠 정도로 만족하고 기뻐한 나머지 마치 정신 나간 사람처럼 보였다고 포르투갈 선교사 루이스 프로이스는 ‘일본사’에서 전했다.
이로부터 임진왜란은 적어도 히데요시에 관한 한, 그리고 전쟁 초기에는 명을 정복하는 게 목표였다.
히데요시 아래 있던 번주(藩主)들은 명 복속이 가능할지, 이에 앞서 전쟁을 치러야 하는지 의문을 갖고 두려워했다. 그러나 이런 속마음을 드러내지 못했다. 의중을 표명할 경우 반역자로 몰려 처형될 게 분명했다.
히데요시의 명 군사력에 대한 평가는 왜구가 중국 남부 해안지역을 약탈하면서 한 경험을 바탕으로 이뤄진 것으로 추정된다. 수도에서 멀리 떨어졌고 군대가 상주하지 않은 남부 해안지역 주민들은 왜구가 조총 몇 발만 발사해도 모두 마을을 비우고 도망쳤다. 이로부터 일본에는 명의 군비가 형편없다는 인식이 퍼졌다. 그러나 평양성 2차 전투에서 명나라 원군에 패배하면서 일본은 그동안 명의 군사력을 지나치게 과소평가했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
해전에서 이순신이 이끄는 함대에 연전연패하고 전국 각지에서 조선 의병에게 공격받은 데다 막강한 명군에 패퇴하면서 일본의 목표는 당초 잡았던 명 정복보다 낮은 쪽으로 조정된다. 명과 함께 조선을 분할해 지배한다는 것이었다.
백우진 기자 cobalt100@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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