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과거와 현재와의 대화'라는 E H 카의 말의 진짜 의미는 실은 과거와 현재가 따로 있지 않다는 데 있다고 본다. 즉 과거가 단지 과거일 뿐인지 아니면 현재가 되는지는 과거를 대하는 태도에 달려 있다는 의미다. 어떤 이에게는 불과 3년 전의 일도 과거이겠지만 어떤 이에게는 100년, 200년 전의 일이라도 현대일 수 있는 것이다.
엊그제 300일이 지난 세월호 침몰 사고(라기보다는 '사건')에 대한 우리 사회의 태도도 이렇게 나뉠 수 있을 듯하다. 많은 사람들에겐 지금 이 시간이 2014년 4월16일에, 혹은 그날에서 멀리 벗어나 있지 않을 것이다. 그들에게 300일 전의 일은 기억으로 남아 있는 것이기도 하고 애써 그 기억을 붙들고 있으려는 것이기도 하다. 그들에게는 세월호 사고, 아니 세월호의 교훈은 지금도 앞으로도 현재일 것이다. 반면 어떤 이들에게는 300일 전이 마치 3년 전, 30년 전처럼 까마득한 옛날인 것처럼 보인다. 아예 기억에서 지워져 있거나 그 기억을, 아니 그 사건 발생 사실 자체를 지우려는 것일 수도 있다.
세월호 300일을 며칠 앞두고 저출산 대책을 논의하는 자리에서 '골든타임'이라는 말을 썼던 박근혜 대통령은 둘 중 어느 쪽일까. 재난 전문가들만 아는 용어였지만 지금은 많은 국민들에게 거의 범용어가 돼 있는 '골든타임'이란 말, 그러나 세월호의 아픈 기억과 겹치는 그 말이 대통령에게서 나왔다는 뉴스를 읽는 순간 나는 그것이 기억과 망각 중에 어느 쪽이었을까를 생각해봤다. 세월호에서 300여명의 목숨, 특히 어린 생명들을 구해내지 못했다는 비통함을 눈물로 표했던 대통령으로선 그 말을 고통 없이, 참담함 없이, 처절한 자책 없이는 쓸 수 없었을 텐데. 슬픔과 고통을 딛고 나온 그 말은 세월호에 대한 분명한 기억, 세월호를 잊지 않으려는 굳은 의지를 보여준 것이었을 것이다. 고통과 상처를 껴안는 용기를 보여준 것이었을 것이다.
특히 그 자리가 저출산 대책을 얘기하는 자리였다는 점에서 그 장면은 더욱 의미심장했다. 바닷속에서 죽어간 아이들에 대한 사무치는 회한을 딛고, 아이들을 안심하고 낳을 수 있는 사회를 만들자는 결연한 각오와 다짐을 보여준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 기억의 용기와 각오야말로 복지니 증세니 하는 요즘의 논란에서도 애민의 마음이 비롯되는 원천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것이 과거와 늘 대화함으로써 현재를 발전시키는 길이 아닐까 싶다.
이명재 사회문화부장 prome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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