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기 대궐반·최초 나전칠기 무형문화재 작품 등 8년간 모은 300점 선보여
[아시아경제 오진희 기자] 서울 남산 소월길에 작은 박물관, 그러나 적잖게 의미 있는 박물관이 새롭게 문을 열었다. 지난 1일 개관한 '한국나전칠기박물관'이다. 브랜드 업계에선 '미다스 손'으로 익히 알려진 손혜원 크로스포인트 대표는 지난 8년간 수집해 온 작품 300점으로 이 박물관을 꾸몄다. 남산에 있던 사무실 건물을 다른 곳으로 내보내고는 이를 리모델링한 것이다.
'참이슬', '처음처럼', '트롬', '힐스테이트' 등 숱한 브랜드 네임을 탄생시킨 국내 대표 브랜드 디자이너인 손 대표는 "민족공예로 불려도 될 만한 우리 대표 공예분야가 바로 나전칠기인데 아직 전문 박물관 하나 갖추지 못하고 있다. 우리 박물관은 비록 작은 공간이지만 그래도 컬렉션은 보여드릴 만하다"고 소개했다.
조개껍질인 자개 조각을 붙여 장식하는 나전과 흑빛과 주홍빛 등 고상한 색을 발현하는 옻칠은 수천 년 전부터 이 땅에서 전해져 오던 것이었다. 일제강점기 때만 해도 한반도에 200명 이상의 나전칠기 장인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지금은 손에 꼽을 정도다. 돈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장인들은 줄어들고 옛 공예가 새겨진 작품들을 보려면 오히려 외국에서 찾아야 하는 실정이 안타까워 손 대표는 하나둘씩 작품들을 모아왔다.
이렇게 해서 박물관 수장고와 전시실은 지금 17세기 쌍용문양 대궐반, 지역적 특색이 돋보이는 예천·해주·통영 소반 등과 함께 일제강점기 때 활동한 나전칠기 장인 전성규부터 그의 제자 김봉룡, 김태희, 송주안, 심부길, 민종태 등에 이어 3세대인 이형만, 송방웅, 손대현으로 전해지는 계보를 엿볼 수 있는 작품들로 채워져 있다.
20세기 나전칠기의 징검다리 역할을 했던 전성규의 '금강산그림 대궐반'은 멀리 보이는 산을 가느다란 선으로, 가깝게 있는 나무들은 그 종류를 알 수 있을 정도로 잎이나 줄기들을 세밀하게 자개로 표현해 원근감과 정교함이 뛰어나다. 다리 부분은 풍성하고 화려한 모란당초문으로 가득하다. 서화, 도안, 나전의 줄음질과 끊음질은 물론 옻칠에 이르기까지 모두 능했던 장인의 솜씨를 유감없이 보여주는 대표작이다. 1938년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한 그의 작품과 거의 유사해 비슷한 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손 대표는 이 작품을 어느 일본인 수집가의 가족에게 1억원을 주고 구해 왔다. 1966년 무형문화재(제10호)로 나전칠기장이 새로 지정되면서 그 1호 장인이 됐던 김봉룡의 작품들은 실력과 함께 독창적인 도안이 눈길을 끈다. 구획된 면마다 무궁화를 장식한 구절판이 인상적이다.
현재 활동 중인 장인들의 2인전도 열리는 중이다. 오왕택(나전장), 김상수(옻칠장) 장인이 그 주인공으로, 지난해 밀라노 '법고창신'전에 참가한 이들은 1970~80년대 나전칠기 중흥을 이끌었던 김태희로부터 전통기술을 사사했다. 자개의 반짝거리는 은빛으로 치장한 매화나무, 모란, 수선화 문양이 의자나 옷장 등 현대 가구 디자인에도 멋스럽게 어울린다.
손 대표가 모아 온 작품들은 시가로는 총 50억원이 넘는 규모다. 브랜드 디자이너로 일하면서 벌어들인 많은 돈을 전통 공예작품을 사는 데 써왔다. "돈이 아까웠다면 이렇게 모으지도 못했을 거예요. 오히려 나전칠기에 담긴 얼과 혼을 통해 한국의 공예가 얼마나 위대한지 배우게 됐죠. 나이 들어 알았으니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오진희 기자 valere@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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