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권해영 기자] 충격을 가져다 준 삼성전자 3ㆍ4분기 실적 발표 다음날인 8일 새벽. 삼성 계열사 사장들은 수요 사장단 회의 참석차 오전 6시15분부터 삼성전자 서초사옥으로 속속 출근하기 시작했다. 실적 발표 직후인 만큼 사장들을 기다리던 기자들의 질문공세가 쏟아졌다.
최치준 삼성전기 사장은 3분기 실적을 묻는 질문에 "허허"하는 웃음만 지으며 사무실로 들어갔다. 박상진 삼성SDI 사장은 "나와봐야 알 것 같다"고 짧게 답했다. 유일하게 선방한 반도체 사업을 책임지는 김기남 삼성전자 사장도 삼성그룹 전반의 침체된 분위기를 의식한 듯 실적과 관련한 질문에는 입을 꼭 다물었다.
삼성 사장들의 한결같은 반응은 최근 스마트폰 부진으로 삼성그룹 전반에 번진 위기 의식에서 비롯됐다. 오는 12월 인사에서 최고경영자(CEO)나 고위 임원진들이 싹 물갈이 될 것이라라는 살벌한 소문도 무성하다. 스마트폰 로켓을 타고 실적을 올렸던 계열사들도 가시방석인 것은 마찬가지다.
밖에서도 너도나도 삼성의 위기를 말하고 있다. 삼성보다 더 걱정하고 더 호들갑을 떤다. 그 사이 '갤럭시 신화'라는 찬사도 순식간에 '갤럭시 쇼크'라는 우려 또는 조롱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이 위기를 누구보다도 잘 아는 것은 삼성이다. 잘 나갈 때나 어려울 때나 항상 위기를 대비하며 긴장감으로 무장했던 삼성에는 다른 기업과는 다른 특유의 위기 돌파 DNA가 숨어 있다. 위기를 한계 돌파의 기회로 삼았던 것은 삼성의 주특기다.
불과 5년 전만 해도 삼성은 위기였다. 애플 아이폰에 대항해 야심차게 내놓은 옴니아 스마트폰은 시장에서 외면받았고 삼성은 끝났다는 위기 의식이 팽배했다. 하지만 삼성은 갤럭시S를 만들었고 보란듯이 성공했다. 노키아, 모토로라가 나가 떨어질 때 삼성은 세계 스마트폰 1위에 올랐고 국내 IT 산업 전반의 격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
이 같은 위기 극복의 원동력은 언제나 그렇듯 사람이었다. 그리고 수 십년 동안 삼성에서 위기 돌파 DNA를 체화해 온 사장들은 누구보다도 결연한 의지로 찬바람을 맞으며 매일같이 새벽출근을 하고 있다. 누가 시켜서가 아니다. 누구보다도 현재 삼성이 처한 위기를 체감하고 있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어느 때보다도 삼성의 위기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다. 하지만 찬이슬이 맺힌다는 뜻으로 절기상 한로인 이날 찬 바람을 맞으며 출근하는 삼성 사장들을 보며 오히려 삼성의 희망을 봤다. 지금 삼성에 필요한 것은 자신감이다. 위기를 또 다른 기회로 삼았던 삼성의 모습을 기대한다.
권해영 기자 roguehy@asiae.co.kr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