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1년 5월29일 살벌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대기업 총수 11명이 부정축재 혐의로 무더기 구속되었다. 당시 5ㆍ16을 주도했던 군부에 기업인들 구속은 동요하는 민심을 잠재우는 강력한 정치적 승부수 가운데 하나였다. 규모가 큰 기업의 순서대로 총수가 모조리 구속되다 보니 경제계가 얼어붙었다. 수사를 받고 있는 나머지 기업인들도 엄혹한 군사통치하에서 언제 무슨 혐의로 구속될지 몰라 전전긍긍했다. 투자가 얼어붙고 공장 가동률이 낮아지고 고용률도 하락했다.
그러자 당시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국가재건최고회의(의장 장도영ㆍ부의장 박정희)는 구속된 기업 총수들을 사면하는 대신 공장을 건설하게 하고 그 주식을 정부에 납부하도록 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사면을 받는 대신 기간산업에 투자하도록 재계를 독려하고 정부와 재계 간 의견을 조율할 수 있도록 하는 경제기구(전국경제인연합회)가 창립되기도 했다.
당시 사면을 받은 기업인들이 투자하겠다고 최고회의에 제출한 기간산업에는 정유, 제철, 시멘트, 비료, 전기기기, 케이블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군사정부의 엄혹한 압박과 독촉에 바쁘게 움직이기만 했을 뿐 기간산업을 형성하는 공장 건설은 결국 성사되지 못했다. 필요한 재원과 기술이 없고 해외자본도 등을 돌리는 마당에 아무리 정부가 압박하고 기업인들이 투자 의욕을 불태운다고 한들 가능한 일이 없었던 것이다. 결국 사면을 전제로 정부와 기업 간에 했던 투자 약속은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최근 법무부 장관과 기획재정부 장관이 잇따라 "잘못된 기업인도 여건이 조성되면 다시 기회를 줄 수 있다"며 기업인에 대한 가석방이나 사면 논란에 불을 지핀 상황을 지켜보면서 수십년 전 사건을 다시 보는 듯한 기시감(데자뷔)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1960년대 초에도 통하지 않았던 '사면=투자 및 경제활성화' 방정식이 시장경제가 정교하게 발달한 2014년에 유효할 것이라고 믿는 발상과 생각의 전개가 놀라울 뿐이다.
재벌기업 회장들을 사면하는 것은 정치적 결단이므로 정치권이 알아서 책임지면 그만이다. 그러나 그 대가로 만약 기업들에게 투자와 고용을 종용한다면 이는 유효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한국경제에 훨씬 더 나쁜 부메랑으로 돌아올 가능성이 있다. 기업들이 왜 투자를 기피하는가? 투자비용 만큼 매출과 수익을 올릴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세계경제라도 괜찮으면 수출로 돌파구를 찾을 수 있겠지만 2008년 이후 세계경제도 극도의 혼돈기를 맞고 있다.
전 세계가 다 어려울 땐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일단 무모한 확장적 투자를 중단하고 바닥을 다지면서 다음 기회를 노려야 한다. 개인이 주식에 투자할 때 국면이 어려우면 현금성 자산으로 바꿔 신중하게 버티는 것과 비슷한 전략이다. 호황이 기업들에게 돈을 벌게 한다면 불황은 기업의 체질을 단련시킨다. 살아남은 기업들은 뼈아픈 구조조정을 통해 불황에 강한 유전자(DNA)를 갖게 된다. 또 무리한 투자 대신 현금자산을 든든하게 비축해 두다 보면 언젠가 새로운 시대를 주도할 기술이나 산업이 등장할 때 결정적인 투자의 승부수를 던질 수도 있다.
지금 정부가 사면을 대가로 투자를 종용하는 것은 시장성이 없는데 무턱대고 돈을 쓰라는 것이나 다름없다. 기업들이 회사 내에 쌓아둔 이익잉여금을 쓰게 할 생각이라면 차라리 배당을 더 하라고 압박하는 것이 낫다. 배당이라도 늘리면 증가한 자산효과 때문에 내수소비라도 좀 늘어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주식시장에서 최악의 기업은 수익성이 불분명한데 대규모 투자를 감행하는 기업이다. 만약 정부가 기업들에게 경제활성화를 명분으로 계속 투자를 종용할 경우 가장 먼저 등을 돌릴 사람들은 다름 아닌 외국인 투자자들일 것이다
홍은주 한양사이버대 경제금융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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