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반기에도 레베카, 황태자 루돌프, 마리 앙투아네트 등 잇따라 공연
[아시아경제 조민서 기자]뮤지컬 '레베카'가 공연된 17일 서울 한남동 블루스퀘어 공연장. 죽은 레베카를 대신해 맨덜리 저택에 새 안주인으로 들어온 '나(임혜영)'와 이에 대한 경계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집사 댄버스 부인(옥주현)과의 갈등이 최고조로 이르는 장면이었다. 무대 왼편에 있던 레베카의 방 창문은 순식간에 발코니로 전환되면서 무대 중앙으로 옮겨졌고, 보라빛의 조명은 음산한 분위기를 더했다. 좀처럼 속을 알 수 없는 인물 댄버스 부인이 '나'에 대한 적대감과 죽은 레베카에 대한 집착을 드러내면서 작품의 주제곡이나 마찬가지인 '레베카'를 부르기 시작한다. 3옥타브를 넘나들면서 부르는 이 곡이 끝나자 관객들의 환호와 박수가 쏟아졌다. 이 미스터리한 스릴러 극에 본격적으로 관객들이 동화되는 순간이다.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의 동명영화를 무대로 옮긴 작품 '레베카'는 지난해 초연 당시 흥행에 성공하며 그해 각종 뮤지컬 시상식을 휩쓸었다. 귀족인 막심 드 윈터는 불의의 사고로 아내 레베카를 잃은 후 휴가지에서 만난 '나'와 사랑에 빠진다. 결혼식을 올린 두 사람은 맨덜리 저택에서 생활을 시작하지만, 집사 댄버스 부인은 마치 레베카가 살아있는 듯 '나'의 존재를 철저히 무시한다. '나'의 숨 막히는 생활이 계속되면서 레베카의 죽음에 얽힌 비밀도 하나둘 밝혀지기 시작한다. 귀에 착착 감기는 노래, 3D영화를 보는 듯한 무대장치, 탄탄한 원작을 바탕으로 한 플롯, 맞춤형 배우 캐스팅 등으로 '레베카'는 공연 시장 불황에도 3층 객석까지 꽉 채울 정도의 인기를 과시하고 있다. 또 한가지 요인이 더 있다. '레베카' 역시 최근 국내에서 관객들이 많이 찾는 유럽뮤지컬이라는 점이다.
"유럽이 뮤지컬의 원조"
프랑스, 체코, 오스트리아 등에서 물 건너온 유럽뮤지컬은 지금까지 국내 시장에서 대세를 이루었던 미국 브로드웨이나 영국 웨스트엔드 작품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높은 인기를 끌고 있다. 유럽뮤지컬이 국내시장에서 흥행한 첫 성공 사례는 프랑스 뮤지컬 '노트르담 드 파리'의 2005년 내한 공연때였다. 이 작품은 당시 세종문화회관 최단 기간 최고 관객 수를 기록했으며, 곳곳에서 암표까지 등장했을 정도로 신드롬을 일으켰다. 이후 제작사 EMK뮤지컬컴퍼니가 2010년 이후부터 '모차르트!', '엘리자벳', '레베카', '몬테 크리스토' 등과 같은 작품들을 들여와 잇따라 흥행에 성공시키면서 '유럽뮤지컬 붐'이 본격적으로 일었다. '잭 더 리퍼', '삼총사' 등의 인기도 한몫했다.
유럽뮤지컬은 아름다운 음악과 화려한 무대장치, 고전을 바탕으로 한 탄탄한 플롯 등의 특징을 갖고 있는데, 국내에서는 이를 다시 국내 관객들의 정서에 맞게 수정해서 선보이기도 한다. 영미권 라이선스 제작사들은 대사의 토씨 하나 바꾸지 못하게 하는 등 엄격한 라이선스 규정을 들이미는 반면 유럽 제작사들은 비교적 느슨한 규정을 제시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EMK의 임수희 홍보팀장은 "이미 국내 시장에서 영미권 작품들은 포화된 상태였기 때문에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는 차원에서 제작사들이 유럽을 눈여겨보고 있다"며 "특히 유럽은 클래식이 발달하고 많은 음악가를 배출한 곳이기 때문에 그런 분위기와 정서가 뮤지컬 작품에서도 깔려져있다"고 말했다.
하반기에도 유럽뮤지컬 열풍 계속
이런 인기에 힘입어 한동안 유럽뮤지컬의 인기는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지난 6일 개막한 '레베카'는 11월9일까지 공연을 이어나간다. 다음 달 11일에는 황태자 '루돌프'가 서울 디큐브아트센터에서 개막한다. 1889년 1월30일 오스트리아 황태자 루돌프와 그의 연인 마리 베체라가 권총으로 자살한 '마이얼링 사건'을 모티브로 한 작품이다. 11월1일에는 18세기 파리 베르사이유 궁을 배경으로 한 '마리 앙투아네트'가 국내에서 첫 선을 보인다. 옥주현, 김소현, 윤공주, 차지연 등의 캐스팅으로도 벌써부터 화제가 되고 있다. 내년 1월에는 '노트르담 드 파리'가 한국초연 10주년을 기념해 프랑스 오리지널팀이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직접 내한공연을 펼친다.
하지만 유럽뮤지컬이라고 무조건적인 박수를 받는 것은 아니다. 유럽뮤지컬의 본질과 속성을 고수하면서도 한국 관객들의 입맛에 맞게 현지화 전략을 조화시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지난 4월 개막했던 '태양왕'은 프랑스인들에게 절대적인 존재인 '루이 14세'를 다루고 있지만, 국내 공연에서는 개연성없는 인물 묘사와 억지스런 전개 등으로 별다른 호응을 이끌어내지 못했다. 뮤지컬평론가인 원종원 순천향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는 "유럽뮤지컬의 속성과 전통을 잘 반영한 작품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작품들도 꽤 있다. 이들 작품을 수입해오면서 현지화 과정을 거치는데, '한국화'가 '싸구려화'를 의미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더 많은 실험과 투자를 하는 등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조민서 기자 summer@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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