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철 과일이 맛도 좋고 건강에도 좋은 건 알지만 제대로 고르는 건 참 어렵다. 유학 시절 주부로 살림을 시작한 도시에서는 대형 슈퍼마켓에 사시사철 온갖 과일이 즐비해 계절이 바뀌어도 무엇이 제철 과일인지 몰랐다.
다행히 귀국해서는 시어머니 덕택에 주로 재래시장에서 장을 보다보니 제철 과일을 챙겨 먹게 되었다. 과일, 야채, 생선, 고기 거의 모든 종목에서 시어머니는 어떤 것이 싱싱한지 기가 막히게 잘 골라내시는데 대구가 고향인 까닭인지 그중에서도 사과 감별은 명중률 100%다. 색깔, 냄새만이 아니라 꽁무니가 얼마나 움푹 들어갔는지 둥근 형태가 어떻게 둥근지에 따라 상당히 체계적인 감별법을 갖고 계신데 이번 추석에도 어머니 덕택에 사과 하나는 참 맛있게 먹었다.
새학기가 시작되면 사과가 아니라 사람을 고르는 임무가 시작된다. 한국과학기술원(카이스트)은 다른 대학들보다 대학원 전형을 거의 한 학기 일찍 시작해서 내년 3월 입학생들을 9월에 선발한다. 학부 전형도 10월 서류 심사, 11월 면접을 마치면 수능이 끝나기도 전에 당락이 결정된다. 입시만이 아니라 수업 첫 시간에 나눠주는 강의계획서에도 어떻게 성적을 낼지 평가 기준을 적게 되어있는데 이 또한 일종의 사람 고르기이다. 한 학기 동안 무얼 기준으로 학생을 평가할 것인가 제시해야 하기 때문이다.
박사 과정 때 전공 수업을 다 듣고 나서 1년 더 다른 프로그램에서 수업을 들은 적이 있다. 미국에서는 정치학 연구가 상당히 계량화되어 있어 수학, 통계를 많이 배워야 한다. 마침 유학 중이던 대학에서는 사회과학 전공 대학원생들을 위해 특별 수학 협동과정을 운영하고 있어서 지도교수의 추천으로 이 프로그램에서 공부하게 되었다. 첫 수업이 나중에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로저 마이어슨 교수의 강의였는데 개인의 의사결정 과정을 수학적으로 모델링하는 방법을 다루는 과목이었다. 같이 수업을 듣던 동료들은 대부분 수학을 많이 쓰는 경제학과 학생들이어서 아니나다를까 첫 시험 성적이 전공 과목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점수가 나왔다. 다른 과목에 비해 훨씬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였지만 그 학기 내내 나는 그 과목에서 시험 점수로 자선 사업을 실컷 했다(꼴찌를 도맡았기 때문에).
그런데 성적 게시 기간에 성적을 확인하니 A라고 나와 있었다. 교수님이 실수한 게 분명했다. 알파벳순으로 내 바로 앞 친구가 시험마다 1등을 도맡아 한 친구였기 때문에 성적을 입력하면서 한 줄씩 내려 적은 것이 틀림없었다. 성적은 안 좋아도 양심은 바른 학생임을 증명하기 위해 교수님을 찾아가 성적 오류인 듯하다고 말씀드렸다. 놀랍게도 교수님은 내 이름을 똑똑히 부르면서 그게 맞다고 했다. 이유인즉 내내 1등을 한 친구는 처음에도 80점, 나중에도 80점인데 (물론 정확한 점수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나는 15점에서 50점으로 크게 향상했기 때문이란다.
이 에피소드를 첫 시간 강의계획서를 나눠주면서 들려주면 학생들이 참 좋아한다. 중고교 시절부터 남과의 비교를 통해 자리가 정해지는 치열한 상대평가 경쟁을 뚫고 온 학생들이어서 소설처럼 들리는 모양이다. 그런데 막상 그 교수님처럼 평가를 하려면 좀 골치아프다. 수십 명이 듣는 학부 수업에서 학생들이 어떻게 일취월장하는지 확인하려면 주기적으로 학생들의 변화를 모니터해야는데 이만저만한 수고가 아닐 터다. 물론 조교와 엑셀의 도움으로 대형 강의라도 자잘한 점수의 합산은 금방 할 수 있지만 점수의 변화 이상으로 개개인의 변화를 제대로 알아낸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강단에 선지도 10년이 넘어가는데 명중률 100%로 한 철을 잘 자란 사과를 고르시는 시어머니처럼 한 학기 잘 자란 학생을 찾아내려면 얼마나 연륜이 더 필요할지 궁금한 노릇이다.
김소영 카이스트 과학기술정책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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