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섹스에 대한 명상
정말 모를 것이, 섹스다. 다 안 것처럼 느껴졌는데 갈 수록 난해하다. 언제는, 조물주의 인류 유지 계획에 반강제적으로 참여하도록 고안된 석연찮은 프로젝트로 이해하기도 했고, 어떤 때는, 고독한 존재와 고독한 존재가 드디어 그 고립을 뛰쳐나와 관계의 틈새를 최소화하여 낙원을 만들어내는 지혜로 이해하기도 했지만, 모두 불완전한 설명이었다. 섹스는, 여성에게는 금지와 유혹, 그리고 남성에게는 공격과 굴종의 뫼비우스의 띠로 이루어져있다는 보들리야르의 통찰은 매력적이다. 영화 ‘색계’는 섹스에 관한 개론을 환기시켜준다.
섹스는 자아를 위해서 살도록 되어있는 인간이, 타인과 관계하는 일로써 즐거움을 얻도록 설계되어 있다. 그런데 그 즐거움이 자아 내부에서는 얻을 수 없었던 급진적이고 혁신적인 즐거움이라는 게 문제다. 타인을 향한 욕망, 혹은 즐거움은 ‘사랑’이라는 광범위하고도 모호한 말로 표현되기도 한다. 사랑은 본질적으로 섹스를 가리거나 미화하기 위해 탄생한 말이기에, ‘내숭’을 완전히 벗을 순 없다. ‘사랑한다’와 ‘섹스한다’를 같은 말로 놓는 일이 꺼려지는 건 그런 까닭도 있다. 사랑이 없는 섹스와 섹스가 없는 사랑은 천지 차이지만 ‘섹스’에 대한 위선적 경멸 때문에, 후자가 더 아름다운 것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색계’의 이안 감독은 섹스와 사랑 사이에 인간들이 쳐놓은 가식적인 칸막이를 걷어치운 공로가 있다. 정보부 대장 ‘이’(양조위)와 그를 유혹하여 암살하려는 ‘왕치아즈’(탕웨이) 사이의 섹스를 사랑이라고 말하고 싶은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그러나 영화를 보고난 뒤 ‘이’와 ‘왕치아즈’ 사이에서 생겨난 기묘한 감정들을 사랑이라고 말하는 일에 주저할 사람도 없지 않을까 한다. 저 기계적이고 전략적인 섹스에서도 사랑이 피어난다. 그리고 그 ‘사랑’은 섹스를 최악으로 활용한 두 사람을 아주 쉽게 용서하게 만든다. 사랑은 왜 인간의 판단을 흐물흐물하게 할까.
‘이’대장의 마음의 문은 안으로 잠겨있었다. 그걸 밖에서 열 순 없게 되어있다. 이대장이 직접 문고리를 잡아야만 열 수 있다. 왕치아즈는 섹스를 통해 이 남자의 마음의 문을 열었다. 방심이 곧 죽음을 의미하는 불안한 생존 환경 속에서 의심과 경계를 체질화한 이대장이 왕치아즈에게 문을 연 것은, 그녀의 섹스에서 진정한 감정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섹스 속에서 사랑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녀의 사랑은 불안하고 고독하고 지친 영혼을 부드럽게 감싸안았다. 여자를 묶어야 섹스를 할 수 있었던 이대장의 극도의 방어기제는, 온몸으로 느껴지는 섹스의 진정한 위안에 조금씩 풀려버린다. 왕치아즈의 입장에서 보면, 연기(演技)하듯 섹스를 시작했지만, 저 의심많은 사람을 믿게 하기 위해선 그 또한 진정한 섹스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역설이 우선 그의 자물쇠를 풀긴 했지만 그런 가운데 스스로의 자물쇠까지 열어버렸다. 사랑은 거짓을 녹여버린다. 우리가 감동하는 지점은 저 어디쯤 있는 것이리라.
2. 스파이 콤플렉스
왕치아즈는 ‘막부인’으로 행세한다. 가짜 신분이다. 그녀는 항일운동 그룹에서 파견된 전사(戰士)이다. 그녀의 무기는 섹스이다. 이대장은 친일파 관료이며 왕치아즈가 척결할 대상이다. 이대장의 비밀들은 상부에 보고되고, 그녀는 상부의 지령에 따라 움직인다. 스파이의 정체성 문제를 다룬 영화는 ‘무간도’가 압권이었다. 스파이는 자신이 맡고 있는 가짜의 삶과 자신이 속해있는 진짜의 삶을 혼동해선 안된다. 그러나 ‘가짜의 삶’에 철저해질 수록, 가짜의 삶이 진짜처럼 느껴진다. 인간의 삶은 연기(演技)가 아니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일정하게는 연기와 닮은 구석이 있다. 어디까지가 연기이며 어디까지가 진짜인지 알기 어렵다. 역할과 페르소나는 인간의 많은 행위들이 연기와 다르지 않음을 설명해준다.
팩션(faction) 소설가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카포티>는 이런 주제가 스파이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는 걸 보여준다. 소설가 트루먼 카포티는 잔혹한 살인을 저지른 살인자를 취재하기 위해 정기적으로 만난다. 이 살인자는 카포티에게 신뢰감을 느낀다. 작가는 더 많은 이야기를 이끌어내기 위해 살인자에게 ‘친구’가 되어줄 것을 약속한다. 감옥에서 인터뷰를 하고 나오면 작가는 ‘냉혈한’이라는 소설을 쓰고 있다. 냉혈한은 바로 살인자이다. 이 남자는 사형 집행일에도 작가를 보고 싶어 했다. 작가가 느끼는 갈등은, 연기와 진실이 서로 넘나드는 경계를 보여준다. 영화를 보고나면 카포티가 오히려 냉혈한에 가깝다는 인상을 받기도 한다.
왕치아즈는 막부인이라는 가짜의 삶을 산다. 그러나 연기를 거듭하면서 어느 순간 자신이 진짜 막부인이 되어있는 것을 느낀다. 이대장은 적이며 살해해야할 인물이다. 그런데 그와의 섹스들은 왕치아즈의 정체성에 혼란을 가져다 준다. 그녀는 ‘이대장의 연인’인 가짜 현실을 어느 순간 진짜 현실로 받아들인다. 스파이가 스파이임을 잊고 자신의 배역을 진실로 받아들이는 건, 인간이 꾸며낸 ‘가짜’들을 유지하는 일의 피로도를 말해주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거짓과 가식들을 끌어당기는 거대한 진실의 자력(磁力)이 있는 게 아닐까. 섹스는 거짓의 유통을 허물어뜨리는 하느님의 ‘진실 프로젝트’일지도 모른다.
3. 친일(親日), 미운 놈과 더 미운 놈
이 영화가 우리의 살갗으로 스며드는 이유는 같은 역사적 경험을 우리도 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이대장은, 이완용과 박제순, 이지용 등의 을사오적을 떠올리게 한다. 그런 고관이 아니더라도 동네마다 권력에 영혼을 팔아 제 동족을 괴롭히는 일에 앞장섰던 사람들의 기억은 친일(親日)이라는 말만 나와도 경끼를 하게 만드는 그림자를 남겼다. 1942년 일제 강점하의 상하이에서 활동하는 대학생 항일단체는 그래서 우리에게 일정한 유대감을 불러 일으킨다. 그들이 증오하는 1차 대상은 항거할 수 없을 만큼 큰 권력인 일본인들이 아니라, 그 일본인들에게 빌붙어 권세와 영화를 누리는 중국인들이란 점은 곱씹을 만하다. 일본군보다 더 미운 친일파.
이 문제는 이 땅에서 일어난 숱한 친일 논란들의 ‘비이성적인 관점들’과 관련이 있다. 가해자를 증오하는 것보다, 가해자에게 굴복하고 그 권력에 빌붙은 동족에 더 분개하는 일은 인간의 본능에 가까운 것인지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정상적인 판단일 수는 없다. 일본인보다 더 치사하고 악랄하게 동족을 괴롭힌 친일 앞잡이가 있었을 것이고, 그들이 우선 지탄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국력의 열세로 나라를 빼앗긴 상황에서, 끓어오르는 증오를 직접적인 원인제공자에게 퍼붓지 못하고, ‘비굴한 동족’에게만 퍼붓는 현상은, 판단의 형평의 문제가 있어 보인다. 이 영화의 핵심 모티프도 거기에서 나온다. 친일파 이대장은, 중국인들이 증오하는 대상이다. 1945년 일본 천황이 무조건 항복을 하기 3년전의 상하이는, 한반도의 경성(京城)과 분위기가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말기에 이른 전쟁에 광분한 일본과, 그것에 충성하는 친일파들. 왕치아즈가 자기의 몸까지 내주며 이대장을 죽이고자 하는 것은, 중국인들의 ‘증오’의 화살끝에 서는 일이었다.
그런데 이 영화를 곰곰이 뜯어보면, 항일단체에 대해 이안감독이 일방적으로 우호적인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된다. 저항군의 하부조직원들이 모두 죽어도 '대빵'은 살아남는다. 그에게 조직원들은 그저 자신의 목적을 수행하기 위한 소모품처럼 보인다. 그리고 조직원들 또한 자신의 의기(義氣)를 보여주려는 충동은 있지만, 목적의식이 뚜렷하지 않은 관성적 행동에 가까워보인다. 또 민족의 반역자인 이대장에게도 감독은 적의의 시선 만을 보내지 않는다. 일본에 대한 은밀한 저항감이 이대장의 입으로 표현되기도 하고, 냉혈한의 가슴 속에 일어난 사랑을 조명하기도 한다. 영화에 등장하는 두 진영(친일 정부와 항일 조직원)은 모두 자기의 배역을 수행하고 있을 뿐이라는 인상을 받는다. 색(色)은 그 배역을 허물어뜨리는 힘이며, 계(戒)는 그런 힘에 대한 비상등을 켜는 일이다. ‘친일’ 문제에 대해, 일정한 평정심을 유지하는 영화의 ‘기분’은, 우리로선 문득 놀랍다.
이상국 편집에디터, 스토리연구소장 isomi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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