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존 54명 평균 88세, 증언할 시간이 얼마없다
[아시아경제 김동선 기자, 주상돈 기자, 김민영 기자, 김보경 기자] 50년간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잊고 살고 싶었다. 그 일이 떠오르면 술을 마시고 담배를 꺼내 물었다. 그때마다 그날이 더 생생하게 떠올랐다. 결국 잊지 못했다. 전화기를 들어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에 전화를 걸었다. "내가 그 피해자요." 이 말을 하기까지 꼬박 반세기가 걸렸다. 17세 소녀는 흰머리가 희끗한 67세의 노인이 돼있었다.
1991년 8월14일 고(故) 김학순 할머니는 국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로는 처음으로 정대협을 찾아 공개증언을 했다. 1988년 윤정옥 교수가 위안부 문제를 세상에 처음 알린 이후 3년 만에 나온 첫 생존 피해자 증언이었다.
"저는 일본 군대 위안부로 끌려갔던 김학순입니다. 뉴스에 나오는 걸 보고 단단히 결심했어요. 이제는 바로잡아야 한다. 저렇게 거짓말을 하는데 왜 거짓말을 하는지 모르겠단 말이야. 그래서 결국엔 나오게 됐어요. 누가 나오라고 말한 것도 아니고 내 스스로. 칠십이 다 됐으니 이젠 죽어도 괜찮아. 근데 나올 땐 조금 무서웠어요. 죽어도 한이 없어요. 이젠 하고 싶은 말은 꼭 하고야 말 거니까. 언제든지 하고야 말 거니까. 내 팔을 끌고 이리 따라오라고 했던 그때 그 사람에게…."
◆김 할머니 공개증언 6년만에 폐질환으로 세상 떠나=그날의 일을 담담하게 이야기하던 할머니는 위안소의 기억을 끄집어내고는 목이 메어 한동안 말을 잊지 못했다. 하지만 "절대 이것은 알아야 합니다. 과거에 이런 일이 있었으니까…"라고 말하면서 김 할머니는 다시 결연해졌다.
당시 한국정신대연구소에서 일했던 이상화 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 교수는 서울 종로5가에 위치한 김 할머니의 집을 찾았다. 그동안 각종 문헌으로만 확인한 위안부의 존재를 김 할머니를 통해 확인해야 했다. 공개증언에 나섰던 김 할머니도 구체적인 위안소 생활을 말하기 꺼려했다.
이 교수는 김 할머니의 집을 1년간 10여차례 방문했지만 증언을 채록한 것은 5~6차례에 불과했다고 한다. 큼직한 녹음기를 꺼내 놓고 증언을 받았다. 들쑥날쑥한 위안소 생활에 대한 퍼즐을 맞추기 위해 이 교수는 이름과 연도, 장소, 옷 색깔, 일본군의 계급장 등을 묻고 또 물었다. 그럴 때면 김 할머니는 "그 얘기가 뭐 자랑스럽다고 그렇게까지 자세하게 캐물어. 이제 그만해"라고 하기도 했다.
김 할머니는 꼿꼿하고 단정했다고 이 교수는 기억했다. 처음 만난 날 할머니는 옅은 색 치마와 나일론 블라우스 차림이었고 방도 정갈하게 정리돼 있었다. 김 할머니는 때론 다른 사람 얘기를 하듯 무심하게 그 일을 전했다고 한다. 구체적인 기억을 되새길 때는 눈물을 보이기도 했는데 분에 겨운, 울분이 섞인 눈물이었다. 그만큼 일본군에 대한 분노가 컸다.
김 할머니는 지나가는 또래 할머니를 보면 '저 여자의 삶을 어땠을까. 나 같지는 않았겠지'라는 생각을 자주 했다고 한다. 결혼해서 자식을 낳고 사는 평범한 삶을 살지 못한 안타까움 때문일 테다. 김 할머니는 공개증언을 한 지 6년 만인 1997년 12월16일 서울 동대문 이화여대 부속병원에서 폐질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당시 위안부 피해자 20여명의 증언을 채록한 이 교수는 "할머니들은 공통적으로 정상적인 결혼을 하지 못한 '한'과 가난한 집 딸이었다는 원망, '나라가 약하니 내가 끌려갔지, 또 나라가 그동안 우리를 너무 외면했다'는 나라에 대한 원망, 그리고 '다시 태어나고 싶다'는 얘기를 많이 했다"고 말했다.
◆정부, 1992년 '정신대 실무대책반' 조직해 피해자조사=1992년 한국정부는 당시 외무부 내에 '정신대 실무 대책반'을 조직하고 전국의 시ㆍ군ㆍ구청에 피해자 센터를 설치해 피해신고 접수 및 조사를 실시했다. 1993년 153명의 피해자가 이름을 올린 후 지난해까지 237명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로 등록했다. 2차 세계대전 때 위안부로 일본ㆍ중국, 이름 모를 남태평양의 섬으로 끌려간 조선 여성은 최소 3만명에서 최대 40만명에 이를 것으로 학계는 추산하고 있는데 이에 비하면 피해 등록자는 극히 일부인 셈이다.
그나마 고령인 피해 할머니들이 계속 사망하면서 생존 피해자들은 갈수록 줄고 있다. 올 상반기에도 황금자ㆍ배춘희 할머니가 돌아가시면서 현재 생존자는 54명(국내 49명ㆍ국외 5명)에 불과하다. 이들의 평균연령은 88.3세로 우리나라 여성의 평균수명인 84.6세를 훌쩍 넘는 고령이다. 정복수ㆍ김복득ㆍ이순덕ㆍ최갑순 할머니 등 4명은 3ㆍ1운동(1919년) 이전에 태어났으니 백수를 앞두고 있다.
'위안부' 할머니들이 노령화함에 따라 이들의 건강은 최근 급속도로 악화됐다. 본지가 입수한 여성가족부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실태조사'에 따르면 지난해 10월 기준 생존 피해자 56명(국내 51명ㆍ국외 5명) 중 41명(73.2%)이 자신의 건강이 '나쁘거나 매우 나쁘다'고 답했다. 이는 2012년 조사 때의 58.3%를 크게 웃도는 수치다. 여가부는 이러한 결과에 대해 "건강실태 조사의 주관적 건강상태에 대한 지난 3년간의 추이를 볼 때, 건강상태가 '나쁜 편'에 속하는 비율이 급증한 것은 향후 국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의 건강에 대한 위협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들의 건강을 지원하는 방안 모색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고 적었다.
◆고협압ㆍ관절염ㆍ치매ㆍ당뇨에 시달리는 생존 피해자들=실제로 본지 취재진이 서울과 경기 광주, 경남 창원ㆍ통영ㆍ남해ㆍ양산, 대구 등을 찾아다니며 직접 만난 '위안부' 피해자들의 건강상태는 심각했다. 경남 마산의 김○○(90) 할머니는 치매를 앓고 있었다. 여기에 당뇨 때문에 눈도 침침하다. 창원의 한 노인병원에 입원 중인 이○○(89) 할머니는 핏덩어리가 혈관을 막는 혈전증을 앓고 있었다. 대구에 사는 김○○(89) 할머니는 기력도 쇠하고 치매까지 앓고 있어 지난해 5월부터 대구의 한 병원에 입원 중이다. 이 외에 대부분의 할머니들이 병치레를 하고 있었다.
생존 '위안부' 피해자들은 주로 고혈압과 관절염, 치매, 당뇨, 골다공증, 안과질환, 소화기계 질환을 호소했다. 하지만 이들의 건강을 위협하는 것은 신체적 질환뿐만이 아니다. 우울증 위험도는 61.2%로 나타났다. 더 심각한 것은 셋 중 한 명(33.7%)은 지난해 자살을 생각했다는 것이다. 2011년 보건복지부가 발표한 노인실태조사에서 65세 이상의 노인 자살 생각률이 11.2%, 85세 이상에선 7.3%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위안부 할머니들의 자살 위험도가 3~4배 높은 것이다. '쓸쓸한 죽음'에 대한 걱정도 적지 않았다. 나눔의집ㆍ평화의집 등 시설이나 자원봉사자의 돌봄을 받고 있는 할머니들을 제외한 8명은 장례를 치러줄 사람이 없다고 답했다.
위안소로 끌려간 지 70년, 위안부 문제가 첫 제기된 지 26년, 피해자의 첫 진술이 나온 지 23년이 지났지만 '진심 어린 사과'를 받고 싶다는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기다림과 힘겨운 투쟁은 아직도 진행형이다.
◈기획 시리즈 진행 중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 1명이 공식 인정돼 시리즈 제목을 '위안부 보고서 54'에서 '위안부 보고서 55'로 바꿉니다.
김동선 기자 matthew@asiae.co.kr
주상돈 기자 don@asiae.co.kr
김민영 기자 argus@asiae.co.kr
김보경 기자 bkly477@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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