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 9월 23일 오전, 베이징 서남쪽 펑타이 구장. 전날 공인체육장에서 열린 제11회 하계 아시아경기대회 개회식 취재를 마친 글쓴이는 숙소인 오주대반점에서 잠시 눈을 붙였다. 그리고 아침 일찍 취재 차량에 올라 그곳에 당도했다. 이미 남북 양 측 응원단이 1루 쪽 스탠드에 자리를 잡고 열띤 응원을 벌였다. 세련된 응원단장 옷을 갖춰 입은 ‘뽀빠이’ 이상룡이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 다소 촌스러운 복장의 북 측 응원단장도 열심히 응원을 이끌고 있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꽤 많은 인원이었다.
사실 글쓴이는 그날 뒤 다시는 그 경기장에 가지 않았다. 소프트볼 선수들에게는 정말 미안하지만. 한국 소프트볼 경기력이 중국, 일본은 물론 대만에도 크게 뒤졌기 때문이다. 실제로 한국은 중국에 0-10, 일본에 0-9로 졌다. 북한에만 2승(1-0 2-0)을 거뒀을 뿐 2승6패(7득점 47실점)로 출전한 다섯 나라 가운데 4위를 했다.
개막 이틀째 가장 이른 시간에 남북 경기가 있었다. 남북 공동 응원이 예정돼 있었기에 글쓴이는 발걸음을 재촉할 수밖에 없었다. 뒤에 보니 이 경기장은 2006년 개수 공사를 해 2008년 베이징 올림픽 때 사용했다. 베이징에 건설된 첫 번째 올림픽 시설이라는 기록도 갖고 있다. 수용규모가 1만3000여 명이니 남북 경기가 열린 그날 1루 쪽 관중석에 모여 있던 양 측 응원단의 규모는 1천여 명이었을 듯하다.
단순한 경기장 스케치만으로는 기사가 되지 않을 것 같았다. 스탠드로 올라가 북 측 응원단 몇몇을 인터뷰했다. 빨간 바탕에 검은색 체크무늬 투피스를 곱게 차려입은 여성에게 먼저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서울에서 왔습니다. 스포츠서울 기자입니다.” 20대 초반의 예쁘장한 이 여성은 미소로 인사를 대신하더니 고개를 갸웃한다. 눈치 빠른 글쓴이가 얼른 상황을 파악했다. “운동 신문입니다.” 그제야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에서 어떻게 오셨습니까.” “평양에서 기차를 타고 왔습니다. 꽤 많이 왔는데 모두 몇 명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초판 마감 시간에 쫓겨 속사포처럼 이어지는 질문에 이 여성은 상냥하게 답했다. “대학을 나와 평양에 있는 기업소(회사)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무슨 대학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2년제였다는 건 확실하다. “외국에는 처음 나왔습니다.” “남쪽 사람도 처음 봅니다.” 하기는 글쓴이도 1987년 2월 뉴델리(인도) 세계탁구선수권대회, 그해 11월 에센(서독) 세계유도선수권대회에서 만난 선수단 임원과 선수 몇몇(이들 가운데에는 뒷날 탈북한 선수도 있다)이 그동안 만난 북한 사람의 전부였다.
메인 프레스센터로 연결되는 직통 전화를 들고 기사를 부르기 시작했다. “남과 북은 23일 베이징 펑타이 구장에서 역사적인 남북 공동 응원이 펼쳐지는 가운데 소프트볼 경기를 갖고… ” 이후 기사에서 ‘역사적인’이라는 표현이 두어 번 더 나온 듯하다. 기사를 받고 있던 동기 녀석이 “야, 네 기사대로 하면 통일이 다 된 것 같다”며 핀잔을 퍼부었다. 올림픽과 아시아경기대회, 종목별 세계선수권대회를 몇 차례 치렀지만 이날만큼은 나도 모르게 좀 흥분했던 것 같아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렇게 남과 북이 대규모 선수단과 응원단을 파견하고 처음으로 공동 응원을 편 베이징 아시아경기대회가 시작됐다. 응원은 응원, 남과 북은 여러 종목에서 치열한 경쟁을 펼치며 메달 레이스를 벌였다. 이 대회 남북 경기의 하이라이트는 탁구 남자 단체 결승전이었다. 한국은 예선 리그를 3연승으로 통과한 뒤 준준결승에서 홍콩을 5-1, 준결승에서 일본을 5-0으로 잡고 결승에 올랐다. 또 다른 준결승에서 북한은 마원거, 천룽찬 등 세계적인 선수들이 버티고 있는 홈 테이블의 중국을 5-1로 물리치는 파란을 일으켰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결과였다. 그 무렵 북한 남자 탁구는 세계적인 수비수 리근상, 뒷날 리분희의 남편이 되는 김성희 등이 이끌고 있었다.
당시 남자 단체전은 세 명의 선수가 나서서 돌려붙는 9단식으로 진행됐기 때문에 접전이 펼쳐지면 4시간이 훌쩍 넘는 경기가 종종 나왔다. 이 경기도 그랬다. 한국과 북한은 게임 스코어 4-4로 팽팽히 맞섰고, 마지막 9번 단식에서 김택수가 북한의 신예 최경섭과 맞붙었다. 김택수는 첫 세트를 21-13으로 따 손쉽게 승리하는 듯했다. 그러나 2세트에서 일방적으로 몰려 15-21로 세트를 내줬고, 마지막 세트에서도 1-8, 3-9로 계속 밀렸다. 하지만 승리를 자신한 최경섭의 무리한 공격이 실수로 이어지면서 김택수의 반격이 시작됐다. 내리 7점을 뽑아 10-9로 역전했다. 최종 스코어는 21-19였다. 한국은 다섯 시간에 걸친 대접전 끝에 대회 2연속 우승을 이뤘다.
이렇듯 열전이 이어졌고 대회가 종반에 접어든 어느 날 아운촌(亞運村·아시아경기대회 선수촌) 인근 류경식당에서 남북 유도 관계자들이 함께한 저녁 모임이 있었다. 자리에는 대회 초반 만난 응원단과는 조금 분위기가 다른 여성 응원단 몇 명이 있었다. 평양음악무용대학, 청진사범대학 학생들이라고 자신들을 소개한 이 여성들은 한눈에 봐도 뽑혀 온 게 확실한, 상당한 미모의 소유자들이었다. 2000년대 들어 세 차례 남녘에 온 ‘미녀 응원단’의 원조라고나 할까.
이 대회 이후 화해 분위기를 탄 남북은 그해 10월 평양과 서울에서 ‘남북통일축구경기대회’를 열었다. 이듬해인 1991년에는 단일팀 ‘코리아’를 만들어 지바 세계탁구선수권대회 여자 단체전 우승, 포르투갈 세계청소년축구선수권대회(오늘날 FIFA U-20 남자 월드컵) 8강의 빛나는 성과를 냈다.
9월 19일 개막하는 제17회 인천 아시아경기대회를 앞두고 북한 선수단과 응원단의 참가 문제로 남북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고 있다. 남북이 원만하게 이 문제를 해결해 스포츠가 24년 전에 이어 다시 한 번 경색된 남북 관계를 푸는 물꼬를 텄으면 하는 바람이다.
신명철 스포츠 칼럼니스트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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