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순씨라 불러주오…배낭 메면 딱 '남자시민' 1호
모친 마흔둘에 늦둥이 아들로 태어나
감옥 4개월에 인생 大역전
참여연대·아름다운재단서 '현장 경험'
市場형 시장으로 친근한 이미지 굳혀
[아시아경제 김혜원 기자] "온전한 혁명도 없고, 완전히 효과가 없는 혁명도 없다. 매일 작은 혁명을 해야 한다."
박원순 새정치민주연합 서울시장 후보는 '온건하지만 혁명을 꿈꾸는 사람'이다. 그의 인생은 중학교 3학년 시절, 교과서 달랑 몇 권 넣은 보따리를 들고 서울행 야간 완행열차에 몸을 실은 그 날부터 변화의 연속이었다. 1956년 경남 창녕의 농사꾼 집안 7남매 가운데 여섯째로 태어난 막내아들이 서울시장 재선에 도전하기까지의 인생 여정은 상상 그 이상이다. 그는 "실패와 고난은 인생의 보약"이라고 말하곤 한다.
경기고와 서울대 입시를 한 번씩 실패하고 맛 본 늦깎이 대학생활은 봄날의 캠퍼스처럼 화창하기만 했다. 불과 3개월 뒤 철창신세를 질 것이라곤 상상도 못 했다.
1975년, 그 해 5월22일이었다. 이때만 해도 철부지였던 대학생 박원순의 인생이 험난한 가시밭길로 접어드는 순간이다. 이화여대생과 미팅 약속이 있던 그는 도서관에서 우아하게 미국 시사주간 타임지를 읽고 있었다. 요란한 함성이 바깥에서 들려와 무심코 내다보니 캠퍼스로 난입한 경찰이 무차별로 폭행하면서 학생들 목덜미를 잡아끌고 있었다. 학생운동이 무엇인지도 모른 상태에서 무조건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 시위는 뒷날 '오둘둘(5ㆍ22) 사건'으로 불렸다. 박원순은 19세의 나이로 소년수로 수감됐다.
어머니는 마흔둘에 본 늦둥이 아들이 귀하기만 했다. 넉넉하지 않은 살림살이였지만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자란 박원순은 서울대 법대 입학 3개월 만에 옥살이를 하면서 부모의 가슴에 한을 안기게 됐다. 당시는 '긴급조치 9호 시대'이자 '인혁당 사건'이 일어났던 해다.
감옥에서의 4개월은 순탄했던 박원순의 인생을 180도 바꿔놓았다. 시위 단순 가담자였기에 복학 조치를 기다렸지만 학교에선 응답이 없었다. 방황하던 박원순은 1976년 단국대 사학과에 다시 입학했고 공부를 시작한지 1년여 만인 1980년 사법고시에 합격했다. 법을 정식으로 공부하겠다고 마음먹은 것도 4개월의 수감생활에서 만난 감방 동료의 영향이 컸다고 한다.
처음에는 검사의 길을 택했지만 '맞지 않는 옷'이라는 걸 깨닫는 데는 6개월이 걸리지 않았다. 부장검사의 권유로 1년을 채우고 나온 그는 1983년 변호사로 개업했고 '인생의 멘토'와 함께 인권변호사의 삶을 살게 됐다. '전태일 평전'의 저자이기도 한 고(故) 조영래 변호사와의 만남은 박원순이 시민운동가로 변신을 꾀하는 첫 단추였다. 둘은 늘 붙어 다녔고 금세 법조계에 이름을 알렸다. 1986년 '정법회' 결성을 시작으로 1988년에는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을 주도했다. 권인숙 성고문 사건과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맡은 것도 이 때였다.
박원순은 인권변호사로 부와 명예를 동시에 거머쥐게 됐다. 그러던 즈음 '조변'은 '박변'에게 "다른 것도 한 번 해보는 게 어떻겠냐. 공부도 더 해봐라"는 조언을 남기고 폐암으로 그의 곁을 떠났다. 조 변호사의 말대로 1990년대 초 2년 동안 영국과 미국을 떠돌던 박원순은 시민운동에 눈을 떴다. 변호사가 법정이 아닌 일상생활 속에서 약자를 대변할 수 있는 길이 바로 시민단체에 참여하는 것이란 확신이 들었다. 그는 곧바로 참여연대를 조직했다. 참여연대에 집중하기 위해 변호사직까지 내던진 박원순은 참여연대에서 일했던 시간을 자신의 삶에서 가장 소중했던 시기라고 말한다. 후배에게 길을 내주겠다며 어렵사리 참여연대를 떠난 그는 한동안 우울증에 시달릴 정도였다고 한다.
시민운동에 발을 들인 박원순은 그 후로도 변신에 변신을 거듭했다. 기부나 나눔 문화가 어색하기만 한 시절, 그는 아름다운재단과 아름다운가게를 만들어 '1% 나눔 운동' 설파에 나섰다. "나 먹고 살기도 빠듯한데 무슨 기부 타령이냐"며 "정치하고 싶은가 보다"는 비아냥도 적지 않았다. 우리나라의 기부문화의 시초를 박원순이 닦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시민운동가 박원순의 마지막 변신은 희망제작소 소셜 디자이너(사회를 디자인하는 사람)로 일단 끝났다. 서울시장에 출마하기 직전까지 마지막으로 맡은 일이 희망제작소 상임이사였다. 그는 희망제작소를 '21세기 실학 운동'이라고 불렀다. 안 가본 데 없을 정도로 전국 방방곡곡을 누볐다. '현장에 강한 시장'이라는 평가를 받게 된 것도 다 이 시절의 경험 덕분이다. 박원순은 "문제를 파악하려면 필히 현장에 가봐야 하고, 문제의 해결책 역시 현장에 있다"고 믿는 실증주의자에 가깝다.
박원순은 어떤 조직을 만들더라도 자신이 대표직을 맡지 않았다. 자신보다 더 훌륭하고 그 조직에 맞는 사람이 나타났을 때 자신의 밑으로 불러올 수는 없으니 늘 비워둔다는 것이다. 조직이 일정한 궤도에 오르면 안주하지 않고 새로운 일을 찾아 떠나왔다.
박원순은 바쁜 와중에 30권에 가까운 책을 펴낸, 지독한 '활자 중독자'이자 '책벌레'이기도 하다.
일각에서는 박 후보가 추진력이 부족하다며 문제 삼는다. 하지만 그는 "뭐든지 한 번 시작하면 완전히 끝날 때까지 한다"면서 "소극적인 성격이지만 집중의 힘은 대단하다"고 얘기한다.
김수진 이화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박 후보의 강점에 대해 '경쟁력 있는 철학'을 꼽았다. 김 교수는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라는 박 후보의 철학은 선진 민주국가가 공유하고 있는 앞서가는 철학"이라며 "현대 민주정치의 큰 조류와 새 정치의 가치와도 일치하는 것"이라고 평가했다.
이종훈 시사평론가는 "이명박ㆍ오세훈 전 시장을 거치는 동안 누적된 재정적자 문제를 해결하다 보니 자신의 역량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한 것 같다"면서 "만약 재선에 성공한다면 큰 그림을 그릴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변신의 귀재'인 박 후보의 종착지는 서울시장이 아닐 지도 모른다. 그의 변신은 현재진행형이다.
김혜원 기자 kimhye@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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