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인문학자 오구마 에이지 교수의 신작 '사회를 바꾸려면'
[아시아경제 조민서 기자]선거 철이다. 흔히들 대의 민주주의 체제에서 선거는 정치를 발전시키고, 미래를 바꿀 중요한 수단으로 여겨진다. 선거를 '민주주의의 꽃'이라고까지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지만 투표의 당위성에 대해서는 공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이런 궁금증도 생긴다. 과연 이 한 표가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4~5년 만에 한 번 있는 선거로는 '달라질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직접 거리로 나서기도 한다. 이라크전 파병, 대통령 탄핵, 미국산 쇠고기 수입 등 굵직굵직한 이슈가 터질 때마다 시민들은 광장에 나가 촛불을 들었다. '촛불 민심'이란 말까지 생겨났다. 그렇다면 이 같은 시민운동은 사회를 바꿀 수 있을까?
일본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인문학자 오구마 에이지(52) 게이오대 역사사회학 교수는 신간 '사회를 바꾸려면'에서 이에 대한 해답을 내놓았다. 이 책은 동일본 대지진으로 후쿠시마 제1원자력발전소 사고가 난 이듬해인 2012년 출간돼 일본 내 인문학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2013년에는 일본 신서대상(新書大賞)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현재 일본 사회운동의 주요 의제로 떠오른 '원전' 문제를 주요하게 다루지만, 이를 위해 고대 그리스 사상과 근대 정치철학, 사회운동의 역사 등 방대한 배경지식을 찬찬히 끌어들인다.
오구마 교수는 2011년 아사히신문사의 여론조사를 인용함으로써 책 서문을 연다. '대지진 후 세상에 도움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강해졌다'고 답한 사람은 71%, '데모에 정치를 움직이는 힘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44%였다. 하지만 '데모 참여에 저항감이 든다'는 사람 역시 63%, '정치에 관여하고 싶지 않다'고 답한 사람 중 '세상이 간단히 바뀌지 않는다'고 이유를 댄 사람은 67%나 됐다. 이 같은 현상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현재의 사회를 바꾸고 싶은 마음은 있다. 그리고 정치가에게 맡기면 된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그렇지만 정치에 관여해도 바뀌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참여하지 않는다. 한편으로 데모가 일어나는 것을 보면, 어쩌면 바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망설이고 의심하는 사람들에게 오구마 교수가 전하는 메시지는 간단하지만 단호하다. "세상은 저절로 좋아지지 않는다. 행동하라!" 앞서 언급한 '선거'는 세상을 바꾸는 데 필요조건이지만 충분조건이 되지는 못한다. "오늘날의 사회는 어딘가에 중앙제어실이 있어서 거기를 점령하면 사회 전체를 조작할 수 있는 구조가 아니기" 때문이다. 결국 투표를 통해 대표가 선출되는 체제는 유력자나 대규모 조직을 등에 업은 사람만이 승리하게 된다. 루소가 말한 대로 '선거가 끝나면 노예로 돌아가는 제도'인 셈이다. 선거기간에는 유권자를 주인처럼 극진히 대접하다가도, 이후에는 '나몰라라'하는 정치인들을 우리는 많이도 보지 않았던가. '선거'도 중요하지만, 여기에 한 발 더 나아가 '직접 민주주의'를 실천에 옮기자는 게 오구마 교수의 주장이다.
'데모'라는 말 자체에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 이들도 있는데, '데모'는 원래 '데모스 크라토스(demos cratos)', 즉 '민중의 힘'이란 뜻이다. 한 번 권력을 향해 구호를 외치고, 변화를 요구해본 이 '경험'은 후에 다른 세상을 상상하는 주춧돌이 된다고 한다. "정치에 무관심한 사람, 불만이 있어도 행동하지 않는 사람이 늘어나면 그 또한 사회를 바꾼다.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바뀌도록 행동하든가, 자신이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바꿔버리고 마는 행동을 계속 취할 것인가 하는 선택이 남을 뿐"이다. 그렇다고 기존의 폭력적이고, 투쟁적이었던 운동 방식을 그대로 따르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축제의 장을 열고, 콘서트를 개최하는 식으로 모든 이들이 "즐겁게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게 오구마 교수의 지론이다. 실제로 오구마 교수는 2012년 탈원전 데모에 어린 딸의 손을 잡고 참가했고, 그의 옆에는 각종 악기를 연주하며 거리를 행진하는 시위대들이 있었다.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 사고는 일본 사회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2012년 6월 일본 수상관저 앞에는 최대 20만명으로 추정되는 시민들이 몰려와 '원전 재가동 반대'를 외쳤다. 3040세대들이 주축이 된 이 평화 시위는 일본에서는 이례적인 현상이었다. 이들은 원전 사고가 단순한 자연재해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일본 내 정경유착, 안전문제, 정부의 정보통제 등이 얽히고설킨 '종합적인' 문제라고 여긴다. 그리고 그 저변에는 '아무도 내가 말하는 것을 들어주지 않게 되었다', '나는 무시당하고 있다'라는 현대인들이라면 누구나 공유하는 문제의식도 깔려있다.
매일 신문과 뉴스를 보며 불평하면서도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은 이들이 쉽게 내뱉는 말이 "그런다고 세상이 달라지겠어?'이다. 하지만 '데모를 해서 무엇이 바뀌냐'는 질문에 오구마 교수는 "데모를 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 수 있다"고 말한다. 사회학자 앤서니 기든스, 울리히 벡, 위르겐 하버마스 등의 이론들도 저자의 주장을 든든하게 받쳐준다. 무엇보다 원전에 대한 고민, 시민운동의 방향성, 탈공업화에 접어든 사회, 고용과 가족의 불안정화 등 일본과 많은 면에서 닮은꼴인 우리 사회에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책이다. "그렇지만 시대가 아무리 마음에 안 들더라도 아직은 무기를 놓지 말자. 사회의 불의는 여전히 규탄하고 맞서 싸워야 하기 때문이다. 세상은 저절로 좋아지지 않는다."(에릭 홉스봄)
(전형배 옮김 / 동아시아 출판 / 1만9000원)
조민서 기자 summer@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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