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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재의 제1구 "엎드려 꼼짝 않는 심판, 아직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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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만에 돌아온 김영기 씨, 프로농구를 호령하다

총재의 제1구 "엎드려 꼼짝 않는 심판, 아직도 있다" 김영기 KBL 신임 총재[사진=KBL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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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이종길 기자]"가족이 모두 반대했지. 아내가 그렇게 친한 한선교의 전화도 피했어. 스트레스받을 남편이 걱정됐던 게지."

'총재'가 돌아왔다. 지난 2004년 한국농구연맹(KBL) 총재직을 내려놓고 야인으로 돌아간 김영기 전 총재(현재 KBL 고문)가 22일 열린 제 8대 총재 경선에서 승리해 다시 한 번 한국 프로농구의 수장이 됐다. "아무런 미련도 없다"며 총총히 떠난 78세의 노장은 왜 복귀를 결심했을까. 그의 출마는 막바지에 내린 결정이었다. 지난 15일 한선교 총재(55)가 연임 포기 의사를 밝히며 후임자로 추천했을 때도 고사했다. "황혼을 즐길 나이다. 왜 이름을 언급해 부담을 주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경선을 하루 앞두고 생각을 바꿨다. "프로농구의 기초공사를 한 담당자로서 이대로 흘러가게 놔둘 수 없다"고 했다.


▶프로농구의 설계자 = 김 고문은 1997년 프로농구 출범을 주도했다. 그해 2월 1일, 필리핀, 대만, 중국에 이어 아시아에서 네 번째로 한국에서 프로농구 시대가 열렸다. 개막 경기에서 안양 SBS 스타즈는 인천 대우 제우스를 108-107로 꺾었다. 경기를 끝까지 보고 집으로 돌아가던 김 고문은 한강 둔치에 잠시 차를 세우고 강물을 내려다봤다. '기어코 해냈다'는 생각에 눈물이 흘렀다고 한다. 그는 1995년 프로농구 추진위원회를 만든 뒤 숱한 어려움을 겪었다. 실업농구 대회인 농구대잔치가 큰 인기를 끌며 성공적으로 운영되던 시절이어서 농구인들은 프로화의 필요성에 공감하지 않았다. 추진위원회 멤버들 사이에도 찬반이 갈렸다. 이인표(71), 최종규(68), 김인건(70) 위원이 김 고문의 곁을 끝까지 지켰다. 김 고문의 KBL에 대한 애착은 남다를 수밖에 없다.

▶두 번째 총재 = 김 고문은 2002년 11월 제3대 총재로 추대돼 2004년 4월까지 연맹을 이끌었다. 프로농구는 최고의 인기 스포츠로 성장했다. 김 고문은 "공중파에서 중계를 했다. 신문 헤드라인도 많이 장식했다"고 했다. 그러나 10년이 흐른 현재 프로농구는 위기다. 중계방송이나 언론 보도 횟수가 크게 줄었고, 팬들의 관심도 이전만 못하다. 김 고문은 "그동안 비경기인 출신들이 행정을 맡다 보니 경기 관리가 소홀했던 것 같다"며 "과거의 재미있고 흥미진진했던 경기를 다시 만드는 것이 급선무"라고 했다. 그는 "일단 명품, 명작부터 만들고 장사할 생각"이라며 세 가지 재미를 되찾겠다고 했다. 빠른 경기 전개와 정밀한 슛, 덩크슛과 같은 화려한 퍼포먼스다. 김 고문은 인기 회복의 열쇠로 심판들의 전문성 강화를 꼽았다. 그는 "선수들의 플레이는 발전했지만 잦은 파울과 오심으로 재미가 반감되고 있다"며 "프로농구가 한 단계 업그레이드되지 못한 결정적인 이유"라고 짚었다.


총재의 제1구 "엎드려 꼼짝 않는 심판, 아직도 있다" 김영기 KBL 신임 총재[사진=KBL 제공]


▶심판 = 김 고문이 KBL 총재를 지낸 2003-2004시즌 프로농구는 구단과 심판 간에 불신의 골이 깊었다. 몇몇 구단은 판정이 불공정하다며 팀 해체를 운운했고, 심판은 심판대로 KBL과 구단에 불만을 표하는 차원에서 등번호 없는 심판복을 입고 휘슬을 물었다. 김 고문이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사임한 결정적인 동기는 2003년 12월 20일 벌어진 안양 SBS의 '몰수패' 파문이다. 당시 정덕화 감독(51)은 전주 KCC와의 경기에서 앤서니 글로버(35)가 테크니컬 파울을 선언받자 항의하다 퇴장 당했다. 이상범 코치(45)는 두 차례 작전시간을 요청하며 심판에 판정에 대한 설명을 요구했다. 심판이 '억울하면 KBL에 제소하라'며 버티자 이 코치는 선수들을 코트에 내보내지 않았다. 프로농구 출범 후 처음으로 몰수패가 선언됐고, 김 고문은 이튿날 기자회견을 열어 몰수 사태에 책임을 진다며 물러났다.


10년이 지난 뒤 다시 KBL을 이끌게 된 김 고문은 "심판들이 여전히 우유부단하고 복지부동하다"고 했다. 그는 "규정을 잘못 적용하는 사례가 너무 잦다. 지휘자 한 명이 악보를 다르게 연주하면 모든 지휘자가 괜찮다는 듯이 따라하고 있다"고 개탄했다. 그러면서 다양한 강구책을 세우겠다"고 다짐했다. 비디오 판독의 확대도 그 중 하나다. 그는 "기계의 힘을 빌려서라도 공정하고 빠른 경기를 하기 위해 심판들에게 많은 노력을 요구하겠다"고 했다.


◇김영기 프로필


▶생년월일 1936년 1월 7일 ▶출신학교 배재고-고려대 법학과


▶주요 이력
1956년~1964년 농구국가대표(멜버른/도쿄 올림픽, 자카르타 아시아경기대회 출전) / 1969년~1975년 농구국가대표 지도자(방콕 아시아선수권대회, 방콕 아시아경기대회 우승) / 1976년 중소기업은행 지점장 / 1980년 대한체육회 이사 / 1982년 대학스포츠위원회 위원장 / 1983년 대한체육회 부회장 / 1984년 로스앤젤레스올림픽 한국 선수단 총감독 / 1985년 대한체육회 선수자격 심사위원장 / 1988년 신용보증기금 전무이사 / 1989년 대한농구협회 부회장 / 1991년 신보창업투자 대표이사 / 1996년 KBL 전무이사 / 1999년 KBL 부총재 / 2002년 제3대 KBL 총재 / 2014년~ 제8대 KBL 총재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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