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7년 봄 경성(京城) 조선호텔. 일본에서 활동한 영국인 변호사 존 개스비와 조선의 수장가 간송 전형필이 만난다. 개스비가 수십년 동안 수집한 고려 청자 22점을 매매하는 협상을 다시 시작하기 위해서였다. 그해 2월 도쿄(東京)에서 시작된 협상은 교착 상태에 빠져 있었다. 양측이 처음 제시한 값의 차이가 컸다.
간송은 개스비를 맞이해 안부 인사를 나눈 뒤 "협상을 재개하기 전 보여드리고 싶은 곳이 있다"며 그를 성북동으로 안내한다. 건물 공사가 한창이었다. 간송은 소장품을 전시할 박물관이라고 설명했다. 개스비가 감탄한다.
"영국에도 이런 규모의 개인 박물관은 흔치 않아요."
개스비는 간송의 뜻이 작품을 개인적으로 모으는 데 있지 않음을 알게 된다. 간송의 목표는 민족의 정신과 예술혼이 담긴 작품을 수집해 많은 사람이 보도록 함으로써 민족의 자긍심을 지키고 고취하는 일이었다.
간송의 큰 뜻에 마음이 움직인 개스비는 가격을 40만원으로 낮춘다. 40만원이면 당시 경성 기와집 400채 값이었다. 그러나 그가 처음 부른 55만원보다 15만원 낮은 가격이었다.
간송은 이 수정 제안을 받아들였다. 이로써 나중에 국보로 지정된 청자오리형연적을 비롯한 세계 최고의 우리 도자기가 우리 품에 돌아왔다. 간송이 아니었다면 일본인 손에 넘어갔을 작품들이다. (이충렬, '간송 전형필')
간송미술관은 1938년에 완공됐다. 간송은 작품을 모은 뒤 박물관을 지어 자랑하는 여느 컬렉터의 순서를 밟지 않았다. 수집 초기부터 미술관을 염두에 두고 있었고 1933년에 이미 간송미술관 터를 마련했다.
간송미술관은 우리의 대표적인 문화유산을 지키고 간직한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돈이 많고 예술품을 좋아하는 컬렉터는 여럿 있었지만 이런 취지로 나선 인물은 간송이 유일했다. 그래서 간송 컬렉션은 삼국시대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전 시대에 걸쳐 서화, 도자기, 공예 등 모든 분야를 망라하게 됐다. 해례본 '훈민정음'이 간송을 통해 빛을 본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간송문화전이 열리고 있다. 우리는 간송미술관 작품을 감상할 때면 우리 문화와 예술을 지키기 위해 재산과 평생을 바친 간송을 떠올려야 한다. 그 그림이나 도자기를 선택해 구해낸 뒤 흐뭇해했을 간송의 눈길로 작품을 완상해도 좋겠다.
백우진 국제부 선임기자 cobalt100@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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