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를 할 때 20대는 얼굴을 보고, 30대는 옷맵시를 보고, 4,50대는 배를 본다는 생뚱맞은 주장의 출처는 얼마 전 대기업 A임원과의 저녁 자리다. "요즘 들어 배가 나오고 허리가 굵어지는 게 영 신경 쓰인다"는 A임원의 하소연을 듣다보니 저런 결론에 이른 것이다.
A임원은 자못 진지했다. 술자리는 늘고, 운동할 시간은 줄어드니 배가 나올 수밖에 없다면서. 건강도 걱정이지만 자기 관리를 못하는 것처럼 비칠까 봐 염려된다면서. 무엇보다도 자녀들이 '꼰대'로 볼까 봐 신경이 쓰인다. 40대 이상이면 기업에서 중책을 맡는 존재이지만 집에서는 아이들과 멀어진 외로운 섬이다. 회사 일에 쫓겨 숨가쁘게 살다보니 아이들은 어느새 머리가 굵어졌다. 그런 아이들의 눈에 비친 똥배는 권위적인 어른의 상징이다.
멀어져 가는 아이들을 붙들어야 하는 것은 A임원 만의 사연이 아니다. 며칠 전 점심 자리에서 정부부처 B국장은 '충격적인 경험'을 털어놨다.
"딸아이 핸드폰을 우연찮게 봤는데 내 전화번호 등록 이름이 '아빠'나 '아버지'가 아닌 거야. 차마 입으로 꺼내기 힘든 표현이었지. 어떻게 나를 저리 싫어할까, 충격이었어. 딸 녀석을 혼낼 힘도 없더라고. 그날 저녁 집사람한테 털어놨더니 한동안 모른 척 하라더군."
그날부터 B국장은 일부러 딸과 거리를 뒀다. 아침 일찍 일어나라고, 저녁 일찍 귀가하라고 늘어놓던 잔소리도 딱 끊었다.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그동안 딸과 나눈 대화가 '하지 마!' '도대체 왜 그래' '무슨 생각으로 사는 거야' 하는 꾸지람뿐이었다는 것을. 아이가 비뚤어진 원인이 바로 자신이었다는 사실에 가슴이 뜨끔했다. 그때부터 칭찬을 해주고 농담도 하면서 살갑게 대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어색해하던 딸도 이내 마음을 열었다.
"나중에 딸과 가까워졌을 때 그 사건을 슬그머니 꺼냈지. 그때 왜 아빠를 싫어했냐고. 그 말에 딸이 어쩔줄 몰라하는 거야. 죄송하다고, 하지만 지금은 아빠가 너무 좋다면서 핸드폰을 보여주는데 '사랑하는 아빠'로 등록돼 있더라고. 가슴이 찡했지."
B국장의 해피엔딩은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이 시대 가장들은 자녀들에 대한 '무한 책임'을 평생 가슴에 안고 산다. 중견기업 C임원은 그 무한 책임을 '한가지 소원'으로 압축했다.
"만약 회사에서 나에게 소원을 말하라고 하면 연봉을 올려달라거나 승진을 시켜달라고 하지 않을 거야. 대신 내 자식이 이 회사에서 일하고 싶다고 할 때 기회를 달라고 할 거야."
C임원의 회사는 월급이 많은 편은 아니지만 정년을 채울 수 있는 비교적 안정된 직장이다. 대(代)를 이어 일하는 가족 직원들도 많다. 소박하지만 그런 조직에서 자식이 속 편하게 일하기를 바라는 마음, 그것이 C임원의 유산(遺産)인 것이다.
세월호 참사 한 달째. 생때같은 자식을 가슴에 묻은 부모들의 피눈물이 마르지 않는다. '보고 싶다' '사랑한다' '미안하다'는 노란색 절규는 팽목항 바닷바람에 혼절한다. "내 아들딸로 태어나 고맙고 행복했다" "하늘에서는 아프지 말고 행복해" "엄마가 지옥 갈게, 딸은 천국 가"라는 피끓는 통곡은 허공을 맴돈다. 생전에 더 많이 안아줬다면…하며 부모들은 가슴을 쥐어짠다. 이 잔인한 슬픔에서 우리는 부모와 자식의 생사를 넘는 사랑을 목격한다.
그러고 보면 A임원도, B국장도, C임원도 앞만 보고 뛰는 이유가 자식 때문이다. 세월호 참사에 격하게 공감하는 그들은 그래서 결심한다. 앞으로 자녀들과 더 많이 얘기하고, 더 많이 안아주고, 더 많이 사랑해주자고. 어쩌면 이것은 세월호 희생자들이 우리에게 남긴,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프고도 '위대한 유산'인지 모른다.
이정일 산업2부장 jaylee@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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