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양낙규 기자] 2월이 되면 떠오르는 인물이 있다. 2월은 김만철씨 일가가 귀순하는 등 다양한 안보 소사(小史)가 있었지만 눈에 띄는 사건은 단연 이한영씨 피살사건이다. 이한영씨는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전처 성혜림의 조카다. 일명 '김정일 로열패밀리'로 분류된다.
이한영씨는 1997년 2월15일 자신의 집 앞에서 괴한의 총격을 받고 살해됐다. 1960년 평양에서 태어난 고 이한영씨는 성혜림씨의 언니인 성혜랑씨의 아들이다. 이씨는 1978년 모스크바 외국어대 어문학부를 전공한 엘리트 출신으로 프랑스어 연수를 위해 스위스 제네바로 들어간 뒤 1982년 9월 서방으로 탈출했다. 이후 같은 해 10월 한국에 망명했다.
한국에 망명한 그는 다른 귀순자와 달리 자신의 신분을 공개하고 국내에서 북한 고위층의 실상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이씨는 1987년 12월 KBS 국제국 러시아어 방송 PD로 입사한 뒤 결혼했다. 결혼 후에도 김정일 위원장과 가족, 측근의 생활을 담은 책 ‘대동강 로열패밀리’란 제목의 책을 펴내 북한 정권의 실상을 세상에 알리는 데 앞장섰다. 그러던 중 1997년 2월15일 오후 9시께 경기 성남시 분당구 서현동 자신의 아파트 엘리베이터 앞에서 괴한 2명에 의해 총기로 피격당해 10일 후 사망했다.
이 사건은 발생 11년 만인 2008년 국가로부터 손해배상을 받았다. 2008년 8월 대법원은 이씨가 피살된 사건과 관련해 국가가 유족에게 손해를 배상할 책임이 있다는 판결을 내렸다. 대법원은 이씨의 아내 김모씨가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9699만원을 지급하라는 원심을 확정했다. 그러나 재판부는 이씨도 국가안전기획부의 만류를 무시하고 언론 인터뷰와 TV 출연 등을 통해 노출한 책임이 있다며 국가 책임을 60%로 제한했다.
지난해에는 이한영씨가 1982년 처음 남한 땅을 밟기까지의 숨 막히는 과정이 정부 문서로 처음 확인되기도 했다. 남한 정부는 이씨를 비밀리에 데려오기 위해 당시 전광석화의 속도로 움직인 것으로 드러났다. 또 이 사이 제네바의 북한 공관은 사라진 '로열패밀리'를 찾기 위해 우리와 이례적으로 접촉까지 요청하며 동분서주했다.
외교부 외교문건 '북한 공작원 김영철 망명사건'(1982년 생산)을 분석한 데 따르면 이씨의 서울행 관련 사안은 이른바 '몽블랑' 보고로 당시 보고됐다. 당시 제네바 주재 우리 대사는 1982년 9월28일 오후 7시(현지시간)에 '몽블랑 보고(1)'이라는 제목의 전문을 서울 외무부에 띄운다. 이씨의 첫 전화를 받은 지 약 9시간 만이었다.
제네바대표부는 전문에서 "28일 오전 9시50분 북괴 공작원 김영철로부터 전화로 아국 귀순 요청을 받았다"고 보고했다. 김영철은 이씨의 가명이었다. 이씨는 1996년 펴낸 수기 '대동강 로열패밀리'에서 "제네바대표부에서 이름도 외교관 여권에 나와 있는 가명 김영철을 댔던 것으로 기억한다"고 말한 바 있다.
이씨는 이 수기에서 "남조선대사관에 전화를 걸어 '나는 북한 외교관으로 미국 여행을 하고 싶은데 방법이 없겠느냐'고 물었다"고 밝혔지만 당시 '몽블랑' 전문에서는 미국과 관련된 내용은 바로 나오지는 않았다.
제네바대사관은 당시 "김영철은 제네바대 병설 어학속성과 연수를 위해 체류 중인 북한 당 연락부 무소속 공작원"이라며 "리민영·이일남(이씨의 북한 본명) 명의의 여권도 소지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또 "김영철을 만나 남한 귀순 의사를 거듭 확인했다"며 "시간제약 등 제반 사정을 고려해 J모 공사와 H모 참사관(외교문서에서는 실명을 거론했음)이 그를 우선 주재국 밖으로 호송했다"고 보고했다.
그 시각 J공사와 H참사관 등 6명은 이씨와 함께 자동차 2대에 나눠 탄 채 스위스-프랑스 국경을 넘어 가장 가까운 국제공항이 있는 프랑스 리옹으로 향했다. 제네바대사는 이후 '주재국 밖으로 긴급 호송한 배경'을 묻는 장관의 물음에 대한 답신 전문(29일 오전 8시10분 발송)에서 "김영철이 주재국(스위스) 당국을 통한 귀순을 극력 반대했고 (북측 귀가 점검 시간인) 13시 전에 불란서로 출국하기를 강력히 희망했다"고 답했다.
29일 오전 10시30분 발송한 전문에서도 "김영철은 (발각 시) '무시무시한 보복'을 말하면서 자신에 대한 위해를 의식, 시종 초조하고 불안감을 표시했다"고 당시의 긴박한 분위기를 전했다.
제네바로부터의 보고를 받은 서울 외무부 본부는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이씨 일행이 스위스 당국에 사건을 알리지 않은 채 국경을 넘었기 때문이다. 사건이 드러날 경우 외교적 파장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번에 공개된 관련 문건에 포함된 '김영철 귀순 대책건의'라는 문서에 따르면 정부는 당시 4가지 귀순 시나리오를 두고 저울질한 것으로 밝혀졌다.
첫 번째 안은 스위스 정부에 사실을 알리고 이씨를 합법적으로 데려오는 방법이었다. 그러나 제3국에 머무르고 있는 이씨가 스위스로 돌아갈 경우 북한 측의 방해공작이 예상된다고 문서는 지적했다.
두 번째 시나리오는 "현 체재국(제3국)의 우리 대사관에 귀순·제3국 정부에 통고·합법적으로 송환"하는 안이었다. 그러나 스위스와 제3국 간 신병 인도를 둘러싼 외교적 분쟁의 위험을 배제할 수 없었다.
세 번째 시나리오는 이씨가 먼저 스위스로 돌아간 뒤 스위스에서부터 합법적인 출국 절차를 거쳐 서울까지 온 이후에 필요할 경우 서울의 스위스대사관에 귀순 사실을 알리는 방법이었다. 그러나 스위스 정부가 사건을 원점으로 돌려야 한다고 주장할 가능성이 있었다. "북한 측의 모략으로 스위스 정부의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지적도 있다고 당시 문건은 전했다.
마지막 안은 이씨가 스위스로 일단 돌아간 뒤 다시 스위스에서 합법적으로 출국해 우리 우방인 대만이나 사우디아라비아에서 귀순을 요청하도록 하는 안이었다. 이 또한 우방과 사전 협조가 필요했고 그 과정에서 정보가 밖으로 샐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문건은 지적했다.
양낙규 기자 if@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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