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이은정 기자] "메이드 인 코리아 같지 않은 브랜드를 만들려고 합니다." 며칠 전 70여년 역사의 한 도자기 업체 임원을 만났다. 이 회사는 내로라하는 국내의 대표 브랜드이지만 2002년 이후 성장이 멈췄다. 10여년간 매출은 500억원 안팎을 맴돌고 있고 영업이익은 10억원을 밑돌고 있다. 혼수 시장이 예전만 못한 상황에서 일반 도자기 시장에서마저 외국 유명 브랜드와 저가 중국산의 틈바구니에 꽉 끼면서 성장 시곗바늘이 멈춰 선 것이다.
그렇다 보니 이 회사의 위기의식은 어느 때보다도 상당하다. 수뇌부는 물론 전 직원들까지 성장 정체를 돌파할 승부수가 필요한 시점인 지금, 변화하지 않으면 100년 장수기업은커녕 생존도 자신할 수 없다는 절체절명의 위기감에 쌓여 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생존 전략으로 나온 아이디어가 바로 프리미엄 브랜드에 '메이드 인 코리아'를 없애자는 것이다. 제품 포장지 한편에 메이드 인 코리아를 쓸 뿐, 본 제품 어디에도 메이드 인 코리아라는 것을 표기하지 않고 브랜드명만 표기할 참이라고 한다.
한국 대표 브랜드인 이 회사가 마치 외국 브랜드처럼 보이게 만드는 '착시 마케팅'을 펼치려는 이유는 간단하다. 소비자들이 유명 수입 브랜드를 선호하기 때문이다. 그동안 여성들의 '마지막 사치'로 불리는 고가 도자기의 경우 40~50대 VIP들이 주로 소비해왔으나 최근 들어서는 30대 일반 여성고객으로까지 소비층이 확대되고 있다. 실제 한 유명 수입 브랜드의 실버 촛대는 150만~400만원, 커트러리는 350만~500만원대의 고가이지만 백화점 식기 코너에서 가장 인기 있는 상품으로 자리매김 했을 정도니 말이다. 이같은 해외 고가 브랜드를 찾는 소비층이 늘어나다보니 백화점 내 한국 제품이 설 자리도 점점 좁아지고 있다. 지난해 리뉴얼을 한 한 백화점의 경우 국내 제품을 모두 철수시키기도 했다. 한국 시장에서 이처럼 벼랑 끝으로 내몰리다 보니 살아남기 위한 궁여지책으로 바로 착시 마케팅을 고민하게 된 것이다.
사실 이같은 마케팅 전략이 낯선 것은 아니다. 경기 불황과 출산율 감소로 성장세가 둔화된 유아동복 시장에서도 유독 외국산 브랜드를 필두로 한 골드 키즈시장만 급성장하자 국내 브랜드들이 던진 승부수가 바로 착시 마케팅이었다. 브랜드 명을 외래어로 표기한 것은 물론 모델도 모두 외국 어린이들로 교체했다. 이 결과 백화점 유아동복 코너에 입점한 브랜드의 절반 이상은 국내산이지만 겉만 봐서는 수입 브랜드와 구분하기 힘들어졌다. 물론 이같은 과정에서 소재나 디자인에 대한 투자도 함께 단행됐다고 하지만 순수 국내산 브랜드임을 전면에 내세웠다면 골드키즈 시장서 살아남기는 힘들었을 것이란 게 관련 업계 분석이다.
문제는 국내업체들이 착시 마케팅 전략을 펼치면서 가격 거품이 함께 생긴다는 데 있다. 수입과 고가에 대한 과시욕과 허영심이 결국 가장 한국적인 제품을 배척하고 가격왜곡 현상을 낳았다는 느낌이다.
콧대 높은 수입업체나 따라가기 전략을 펼치는 국내업체를 탓하기 전에 과시욕에서 비롯된 소비 문화에 대한 자성이 앞서야 하지 않을까 한다. 수출이 대한민국호의 주요 성장 동력이라면서도 한국 시장에서는 메이드 인 코리아를 터부시하는 우리 자화상이 씁쓸하다.
이은정 기자 mybang21@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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