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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저詩]유홍준의 '오월'

시계아이콘읽는 시간36초

벙어리가 어린 딸에게/종달새를 먹인다//어린 딸이 마루 끝에 앉아/종달새를 먹는다//조잘조잘 먹는다/까딱까딱 먹는다//벙어리의 어린 딸이 살구나무 위에 올라앉아/지저귀고 있다 조잘거리고 있다//벙어리가 다시 어린 딸에게 종달새를 먹인다/어린 딸이 마루 끝에 걸터앉아 다시 종달새를 먹는다//보리밭 위로 날아가는/어린 딸을/밀짚모자 쓴 벙어리가 고개 한껏 쳐들어 바라보고 있다


유홍준의 '오월'

 
■ 이 시에는 벙어리라는, 소리를 잃어버린 어떤 아버지와, 종달새라는, 소리와 노래로 날아와 귀에 앉는 어떤 대상이 있다. 아비와 어린 딸은 마루에 앉아 종달새 소리를 내내 들었다. 아비에게 종달새 울음이나, 마루 끝에 앉은 딸의 종알거림이나 매한가지다. 귀엽고 그립고 귀중하고 정겨운 존재이다. 이 시의 반전은 어린 딸이 살구나무 위에 올라앉아 지저귀는 것에 있고, 보리밭 위로 날아가는 어린 딸에 있다. 종달새와 어린 딸이 합쳐져버리는 그것에는, 딸을 잃어버린 아버지의 끔찍하고 납득못할 슬픔이 숨어있다. 아비가 원래 벙어리였을까. 딸이 죽은 뒤 혀가 굳어버린 그 마음이 실어(失語)로 이어진 건 아닌가. 종달새의 울음과 종달새의 울음을 아이에게 들려주고 있는 것으로 환상하는 아비. 그것이 환청처럼 뒤엉켜 시를 꾹꾹 눌러가고 있다. 이 시를 읽노라면 종달새의 소리가 내내 귓전에 울리는 어떤 사내의 달팽이관 속에 들어앉아 숨막히는 기분이 된다. 그리고 살구나무 위에 앉았다 포르르 보리밭 위로 날아가버리는 딸을 바라보게 된다. 봄날의 따스하고 향긋한 무덤같은 시 한 편.



빈섬 이상국 편집부장ㆍ시인 isomi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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