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이경호 기자]올해부터 법정공휴일로 다시 지정돼 '빨간날'이었던 9일 한글날. 세종로 정부서울청사는 평일이나 다름없었다. 대부분의 사무실에 불이 켜졌고 선풍기를 틀며 연신 자판을 두드리고 인쇄된 A4용지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공무원들이 적지 않았다. 14일부터 시작되는 국정감사를 앞두고 각 부처의 현안보고와 의원실에서 요청한 자료를 처리하기 위해서다.
1층과 20층에 마련된 흡연구역에 삼삼오오 모인 공무원들 사이에서 푸념이 쏟아졌다. "의원실마다 유사,중복된 자료제출 요구가 다반사고 한 번 보낸 문서도 다시 보내고 설명도 곁들여줘야 한다"는 불만들이 쏟아졌다. 국감용인지 지역구 홍보용인지, 사적 용도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것도 있고 신문구독료, 경조사비 등 시시콜콜한 자료도 적지 않다고 한다. 한 사무관은 "밤새워 만든 자료를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짜깁기해 정부를 질타하는 보도자료를 낼 때는 허탈하더라"고 말했다.
국감기간에 전국체육대회(18일부터 24일까지)를 개최하는 인천의 경우 공무원노조가 앞장서 국감거부를 선언하기도 했다. 노조측은 "전국체전을 개최한 지자체는 업무 부담 때문에 관례적으로 국정감사에서 제외돼 왔다"면서 "국정감사를 강행할 경우 연대 투쟁과 법정 대응에 나서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여의도 국회에서는 또 한편으로 국감을 준비하느라 낮밤을 잊은 모습이다. 의원실마다 초비상이 걸려 보좌관, 비서관, 인턴 등 너나할 것 없이 주말, 휴일을 반납하고 국감을 준비중이다.
감사를 하는 측도, 준비하는 측도 열심히 하는 것만은 분명하다. 다만 열심히 준비하는 것과 별개로 국감 그 본연의 의미를 찾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이 적잖게 제기된다. 국회의 경우 의원들은 물론이고 의원실의 보좌진들은 국감을 자신의 능력을 입증하거나 인정받는 무대로 생각한다. 자신의 능력을 보여주려는 의욕을 나무랄 수는 없다.
그러나 뭔가 '한방'을 터뜨려야 한다는 생각이 앞서는 것은 문제다. 이런 '빗나간 의욕'이 정책국감, 민생국감이라는 본질을 벗어나 호통과 욕설, 묻지마 폭로를 낳게 되는 것이다. 위에 얘기한 것처럼 국감에 대한 공무원들의 냉소적인 태도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행정부의 입법부에 대한 무시와 회피 경향이 심화되고 있는 것에는 이 같은 이유도 작용하고 있다.
최근 국정감사의 또다른 특징은 민간에 대한 감사다. 각 상임위별로 채택된 증인을 보면 기업인이 대략 200여명이 넘을 것으로 추산된다.사상 최대규모라고 한다. 현행 헌법은 '국회는 국정을 감사하기 위하여 필요한 서류를 제출케 하며 증인의 출석과 증언 또는 의견의 진술을 요구할 수 있다'고 국정감사권을 규정하고 있지만 당사자들은 마구잡이이며 면박주기, 망신주기용 증인채택이라며 반발하고 있다.
올해 국감도 지난해, 아니 여느 해와도 비슷하게 흐를 것이라는 전망이 많다. 특히 지난해의 경우 대선을 앞둔 이명박정부 마지막 해로서 대선후보들에 대한 정치적 공세가 주를 이루고 여야간 난타전을 벌이며 역대 최악의 국감이라는 평가를 받았었다.
국감은 입법부의 행정부에 대한 고유한 견제 권한이자 감시 기능 중 하나임이 분명하다. 번거롭고 힘들지만 입법부와 행정부 모두에 이익이 되는 제도다. 국감을 국감답게 하는 것, 국회와 피감기관 모두에게 제기되는 과제다.
이경호 기자 gungho@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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