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공청회서 제시된 안건들 대부분 제외
[아시아경제 이승종 기자] 국민연금 의결권 강화가 끝내 무산될 지경에 놓였다. 알맹이는 모두 빠진 채 껍데기만 남은 계획안이 통과됐다. 재계의 반발에 정부가 한 발 물러섰다.
9일 보건복지부와 국민연금공단에 따르면 전날 열린 국무회의에서 '국민연금 종합운영계획'이 심의, 의결됐다. 복지부는 지난 2003년 이후 5년마다 '국민연금 재정계산'에 의거해 향후 운영계획을 수립해 왔다. 올해 계획안은 대통령 승인 후 이달 말 국회에 제출될 예정이다.
이번 계획안에는 지난 8월 열린 '국민연금 제도 및 기금운용 개선방향에 관한 공청회'에서 나온 의결권 강화 방안들이 대부분 제외됐다. 복지부는 최종 계획안 마련을 위해 지난해 10월부터 '국민연금기금운용발전위원회'와 '국민연금제도발전위원회'를 운영해 왔다. 2개월 전 공청회는 지난 1년간 연구한 결과를 공개하고 시장 의견을 수렴하는 자리였다.
당시 국민연금기금운용발전위원회는 "투자한 기업의 장기 수익성과 가치를 높이려면 의결권과 주주권 행사를 강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구체적으로 위원회는 ▲적극적인 주주대표 소송 ▲집중감시대상기업 선정 및 관리 ▲의결권 100% 행사 ▲위탁운용사의 국민연금 의결권 지침 준수 등을 제시했는데, 이번 계획안에는 모두 빠졌다. 대신 계획안에는 ▲사외이사 자격요건 제시 ▲책임투자 방안 도입 등 다소 소극적인 대안만 담겼다.
복지부가 의결권 강화 방침을 사실상 접은 건 재계를 중심으로 반발이 심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대기업들은 "국민연금 주식의결권 및 주주권 행사 강화는 자본주의 시스템을 위협할 수 있다"며 반대해 왔다. 이날 이형운 보건복지부 국민연금재정과 과장은 "지난 공청회에서 나왔던 중점감시 대상 목록과 위탁운용사 의결권 지침 등은 시장에서 반대가 많아 제외했다"고 설명했다.
이로써 박근혜 대통령의 대선공약인 '국민연금 의결권 강화'는 사실상 실현이 어렵게 됐다. 올 초 대통령직 인수위원회는 ′박근혜 정부 국정과제′에서 "국민연금 등 공적 연기금의 의결권 행사를 강화해 대기업의 소유, 지배구조의 투명성과 책임성을 제고하겠다"며 국정 전략을 밝힌 바 있다.
국민연금공단은 지난 6월 국회에 보고한 '주요업무 추진 현황' 에서 "경영감시자로서의 기관투자자 역할을 수행하겠다"며 의결권 강화 의지를 보였지만, 결과적으로 허언(虛言)을 한 셈이 됐다.
전문가들은 여전히 국민연금이 적극적으로 주주권을 행사해 주식 가치를 올려야 한다는 의견을 내놓고 있다. 지난해 말 기준 국민연금은 전체 운용자산의 18.7%인 73조5000억원을 국내 주식에 투자하고 있다. 이 비중은 앞으로 5년간 20% 이상으로 늘어난다. 특히 최근 10%룰이 완화되며 대기업을 중심으로 국민연금 지분이 빠른 속도로 증가하고 있다. 26개사는 국민연금 지분이 10% 이상이며, 코스피 대장주인 삼성전자는 국민연금이 1대주주이기도 하다.
해외 연기금을 살펴보면, 미국의 캘리포니아공무원연금(CalPERS·캘퍼스)은 투자기업 중 문제 기업의 목록을 '포커스 리스트(Focus List)'로 작성해 공개한다. 또 네덜란드 사회보장기금(PGGM)은 캘퍼스의 '포커스 리스트'와 유사한 '워치 리스트'에 79개사를 올리고 있으며, 네덜란드 공무원연금(ABP)은 기업들이 노동 환경 개선이나 사회 책임 활동에 나서도록 경영진을 유도해 기업 가치를 높이는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한 금융투자 업계 관계자는 "주식 매매에만 치중해서는 안전한 자산관리가 어렵다. 국민 연금 자산을 안전하게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적극적인 의결권·주주권 행사가 필요한 이유"라고 전했다.
이승종 기자 hanarum@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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