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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들의 사생활 - 8장 추억과 상처 사이(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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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들의 사생활 - 8장 추억과 상처 사이(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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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구나 전쟁의 상처가 아직 채 가시지 않은 남의 나라 베트남에서..... 하지만 한씨 아저씨는 아랑곳하지 않고 주먹까지 휘두르며 군가를 부르기 시작했던 것이다.

사나이로 태어나서, 할 일도 많다만,
너와 나, 나라 지키는 영광에 살았다....!


다들 멋쩍은 표정들이었다. 군대 갔다 온 대한민국 사내라면 누구나 알고 있을 바로 그 노래였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주먹을 휘두르며 반동을 주면서 노래하던 한씨 아저씨의 목소리가 갑자기 울먹임으로 변했기 때문이다.

전투와 전투 속에....!


순간, 한씨 아저씨의 목이 매었다.
“아, 씨팔.”
그는 노래를 부르다말고 한참동안 고개를 숙인 채 씨팔을 반복했다. 그의 어깨가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다들 말이 없었다. 누군가가 낮고 조용하게 뒤를 이었다.


전투와 전투 속에, 맺어진 전우야, 산봉우리에 해가 뜨고, 해가 질 적에,
부모형제, 우리 믿고, 단잠을 이룬다....!


어울리지 않는 군가가 추억이 되어 모두의 가슴에 잔잔한 파문처럼 번져갔다. 동희형의 <그날은 오리라> 와 한씨 아저씨의 <진짜 사나이>는 요즘 편가르기로 하자면 좌파와 우파의 노래쯤 될 것이었다. 하지만 그날 밤, 그곳에선 둘 다 놀랍게도 하나의 감정으로, 모두의 가슴에 슬픈 추억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던 것이다.
달은 너무 밝았고, 달빛에 비친 열대 바다는 불면증을 앓듯 혼자 뒤척이고 있었다.


“밀림 속에서 며칠이 지났어. 먹을 것도 마실 물도 다 떨어진 채 혼자 남았지. 입술은 다 타고 눈만 살았어. 혹시라도 베트콩이라도 마주 칠까 극도로 예민했지. 죽음이 눈앞에 어른거리는 것 같았어.”


버스를 타고 오는 길에 한씨 아저씨가 말했었다. 마침 하림의 옆 좌석이었다.


“밤이었을거야. 어둠 속 저 멀리서 희미한 등불 하나가 비치는거야. 희미한 등불이었지. 캄캄한 밀림 속에서 말이야. 마치 그쪽으로 나를 오라고 손짓이라도 하는 것 같았어. 물론 헛것일 수도 있었어. 나도 그때 그렇게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어디가 어딘지를 알 수 없는 밀림 속에서 다른 데를 갈 엄두도 나질 않았지. 그래서 그저 등불 있는 곳을 향해서만 따라 갔지. 두 손에 총을 꼭 움켜쥐고 말이야.”
버스 안에서 반은 자고 있었고, 몇몇 사람만 한씨 아저씨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근데 기적이 일어났어. 며칠을 그렇게 등불빛을 따라 걸어가는데 어느 순간, 환해지면서 아는 지형이 나왔던 거야. 바로 우리 부대가 주둔하고 있던 근처였어. 밀림이 끝나고 논이 나오고 마을이 나타났어.”


믿거나 말거나였다. 그래도 그가 얼마 전 구찌에서 실종된 사건과 연결해보면 꼭 꾸며낸 이야기 같지는 않았다. 여기까지 이야기 하고 난 그는 갑자기 눈을 빛내며 자기를 쳐다보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 말했다.
글. 김영현 / 그림. 박건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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